紀行도 중독이다
紀行도 중독이다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수필가
  • 승인 2021.07.12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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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수필가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수필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마냥 설레는 그곳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에겐 지루한 일상의 공간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익숙한 이곳의 대척점인 낯선 곳에서 보내게 될 비현실적인 시간에 대한 기대감만 크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고 나면 줄거리 속의 장소를 기억으로 저장시킨다. 국내면 찾아가기가 쉽다. 외국이 배경이면 쉽사리 닿을 수 없어 외국 여행의 기회가 생길 때마다 먼저 영화 속의 장소를 염두에 둔다.

70년대 말, `레만호에 지다'라는 영화를 봤었다. 한국영화지만 레만호라는 제목에 더 끌렸는지 모른다. 스위스를 배경으로 남한 외교관이 북한에서 결혼한 부인을 육이오전쟁으로 헤어진 후, 이국의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다. 옛사랑은 그대로지만 이념이 달라 늘 불안하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지키려 끝내 당을 배신한다. 레만호에서 북한 공작원이 쏜 총에 맞아 죽어가던 여인의 처절한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스위스의 레만호에서 옷이 축축해지도록 걸으며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한 것은 슬프고도 숭고한 영화 속의 사랑에서 헤어나질 못해서였다. 그저 바라만 봤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산과 물이 만나는 경계선을 따라 보이는 아름다운 건축물들, 그토록 오랜 세월 내 영혼은 이 호수와 교감하고 있었던가. 영화장면들이 레만호를 배경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퐁네프의 연인들'도 강렬하다. 세느강을 가로지르는 퐁네프다리에 섰을 때 가난한 연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다가왔다.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모든 게 모자라고 부족한 사랑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는 객관적인 생각일 뿐, 당사자들은 그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 하롱베이에서는 `인도차이나'의 여주인공이 생명의 은인인 프랑스 군인을 찾아가는 험난한 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화산재에 묻혔던 폼페이에서는 그들의 삶이 아주 가까이 있어 충격을 받았었다. 먼 과거의 시간들이 쌓여 현재와 공존하는 로마의 깊은 역사는 일본작가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나서 과거의 시간들이 엄청나게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래전 이곳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던 이들의 혼을 가까이 느낄 수 있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들의 피비린내가, 원형경기장에서는 벤허의 전차경주를 관람하는 관중들의 함성과 말발굽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아직도 영화 속의 장소와 역사, 글 속에 남아 있는 곳은 무궁무진한데 발이 묶인 지금, 가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소설 `클레오파트라'와 `람세스'를 읽고 이집트에 가서 왕들의 계곡과 람세스2세가 세운 신전들을 보고 희미해진 발자국을 따라가 생생한 역사를 들여다보고 싶다. 우크라이나 벌판의 해바라기도,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얼마 전부터 방법을 달리해 역사와 문화기행을 이어가고 있다. 감동은 덜 하지만 한 시간이면 이집트를 다녀오고, 마추픽추도 다녀온다. 오늘은 알래스카에서 빙하와 곰을 만났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다시 기행에 취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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