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이 일상 인 현실부터 보자
표절이 일상 인 현실부터 보자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1.07.1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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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적어도 나는 훔칠때 만큼은 정직했다”. 미국의 영화감독 쿠엔티 타란티노가 했던 말이다. 그는 가장 독창적인 감독으로 평가받지만, 다른 영화들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주변에서 “모방만으로 영화를 만드느냐”고 꼬집자 이렇게 반박했다.

정창화 감독은 무협영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던 70년대 홍콩에서 활약했다. 그의 대표작이 1973년 제작한 무술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그해 미국에서 개봉돼 `포세이돈 어드벤처', `대부 1' 같은 쟁쟁한 영화를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타란티노가 이 영화의 열혈 마니아다. 그는 출세작인 `킬빌'을 만들 때 정 감독에게 간곡하게 부탁해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촬영 기법 일부를 차용했다. “정직하게 도둑질 했다”는 그의 말을 대변하는 일화다.

정직하게 훔치라는 타란티노의 말이 지금 우리를 새삼 추궁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씨의 박사학위 논문이 누군가의 것을 베꼈다는 의혹에 휘말리며 표절 문제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또 등장 했다. 그의 논문은 여권에 의해 `기사나 인터넷을 두루 베낀, 초등학생 과제물만도 못한 허접한 수준'으로 매도됐다. 한 방송사 기자는 취재를 위해 김씨의 지도교수를 추적하다 경찰까지 사칭하는 물의를 빚었다. 비판은 전례없이 냉정하고 집요하며 취재는 경찰을 팔 정도로 결사적이다.

우리 사회가 마침내 `표절 공화국' 불명예를 씻어내기로 굳게 작정을 한 모양인가? 그러나 갈수록 기대감은 사라진다. 가열찬 비판의식이 하필이면 지금, 김씨의 15년 전 논문에서 발동됐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가짜 박사가 횡행한다는 우스개는 실화가 된지 오래다. 학위논문 대행업은 여전히 성업을 누린다. 베끼는 수고조차 남에게 맡겨 박사 딴 사람들이 숱하다는 얘기다. 대학에서 발생하는 표절은 도둑질이 아니라 갑의 지위를 악용한 강탈이 됐다. 제자의 논문에 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제자들의 논문을 짜깁기 해 제 것으로 각색하는 교수가 툭하면 언론을 장식한다. 차마 밝힐 수 없는 원전이기에 정직한 도둑질이 애시당초 불가능해 진게 현실이다.

표절의 실상이 수면으로 올라와 도마에 오른 것은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의 단골 메뉴가 되면서다. 청문회장에 서는 인사들마다 걸리다 보니 논문표절은 위장전입과 더불어 이 땅의 능력자임을 증빙하는 휘장처럼 여겨질 정도가 됐다. 김씨 논문에 칼을 빼든 민주당의 대선 후보들도 이 분야에서 이력이 깨끗하지는 않다. 정세균 전 총리는 박사와 석사학위 논문이, 이재명 지사와 추미애 전 장관은 석사논문이 표절 의혹을 받았다.

지난달 검찰이 고교 재학시절 학원 강사에게 돈을 주고 논문을 대필시킨 학생 39명을 기소했다. 생활기록부의 스펙란을 빵빵하게 채우기 위해 남의 재능을 산 것이다. 10명은 강사가 대신 쓴 글로 대회에서 상을 받아 수시전형에 합격하기도 했다. 대필한 학원강사 18명도 수사를 받는다. 고등학생이 수백만원을 주고 직접 강사에게 대필을 청부했을 리 없다. 범죄를 기획하고 추진한 주모자는 학부모 였을 터이다. 웃기는 건 학부모는 죄 빠져나가고 단 두명만 기소됐다는 점이다. 지금 벌어지는 표절 논란에서는 학생들만 피고로 세운 비겁한 법정이 보인다.

김씨를 변호할 생각은 없다. 윤 전 총장의 말대로 학위를 준 대학이 철저하게 시비를 가리고 사법처리를 포함한 엄정한 조처가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남의 지적노동을 훔치는 도둑질을 일상화해 학생까지 법정에 세운 우리 사회가 김씨에게 유독 모질게 가하는 뭇매가 온당한 지는 곱씹을 일이다. 이재명 지사는 자신과 관련해 “논문표절 의혹을 받은 학위를 반납했으니 끝난 일”이라고 했다. 부끄러운 표절문화를 청산하려면 이런 한가한 문제의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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