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기로 사는 것
이무기로 사는 것
  •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 승인 2021.07.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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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내가 간사 때 모신 스승님은 원불교의 3대 종법사이신 대산 김대거 종사님이시다. 대산 종사님의 옆에는 늘 장산 황직평 종사님이 계셨다. 대산 종사님을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신 종사님이다. 장산 종사님의 추모담 중 마음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한 교무가 다른 동지 교무가 미워져서 장산 종사님께 상담을 하고 들은 이야기이다. 그때 장산 종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무개야, 대종사님은 이 세상에 원불교라는 큰 방죽을 파 놓으신 거다. 방죽에는 잉어도 있고, 미꾸라지도 있고, 개구리도 있고, 지렁이도 있다. 너는 이무기가 되어 살아라. 이무기는 오직 용이 되는 것만 생각한다. 용이 돼서 날아 올라갈 것만 생각하고 사는 거다. 그런데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방죽의 모든 것들한테 다 기운을 받아야만 한다. 심지어는 하루살이에게까지도 기운을 받아야 한다. 그 사람이 미꾸라지일지언정 너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오로지 부처가 될 생각만 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 대산종사님을 처음 모셨을 때 대산종사님이 그러셨다. 시비가 많은 자리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경계에도 여래위와는 바꾸지 마라. 여래가 되는 일, 부처가 되는 일과는 바꾸지 말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부처가 될 수 없다. 그 사람의 기운과 상극이 되는 길이다. 그 사람을 안타까워하고 보듬어줄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원불교에 출가한 이후 10여 년의 수학생활과 또 16년의 교무생활을 지내며 나는 참 많은 시비(是非) 이해(利害) 속에 살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비이해 속 고군분투하던 나는 그저 욕심의 노예로 춤을 추는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그 욕심이 부처가 되고자 하는 욕심, 여래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끄럽게도 내 욕심의 8할은 명예욕(출세욕)이었던 것 같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이다. 원불교로 출가를 한 사람이 명예욕을 부리고 있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원불교도 하나의 사회이고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된 나는 원불교라는 사회에서 크게 성장하고 싶은 욕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작은 나'로 살아가니 그런 것이다. 몸뚱아리를 `나'로 생각하고 작은 몸뚱아리에 갇혀 있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작용을 `나'로 생각하며 오로지 내 몸, 내 생각, 내 것, 내 사람들을 생각하며 살아가니 그런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불의(不義)는 죽기로써 버리고 정의(正義)는 죽기로써 취하라는 법문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하는 일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내 정의'이다. `작은 나'가 판단한 `내 정의'일 뿐이다. 온 우주가 `나'인 부처님의 정의와 나만 생각하는 `내 정의'는 다른 것이다. 중생은 `나'만을 생각하고 지성인은 `나'와 `상대방'을 생각하고 현자는 `나'와 `상대방'과 `제3자'를 생각하고 부처는 온 우주를 생각한다.

미꾸라지가 미운 것은 내가 개구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정의'가 공허한 것은 작은 `나'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정의'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부처로 살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미꾸라지, 개구리로 살기도 싫다. 나는 오로지 부처가 되는 일, 여래가 되는 일만 생각하는 이무기로 살 것이다. 원불교에서 대장을 시켜준다고 해도 싫다. 사회에서 대통령을 시켜준다고 해도 싫다. 부처가 되는 일, 여래가 되는 일에 도움은커녕 방해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설령 용이 되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이무기로 살 것이고, 이무기로 사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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