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금속활자와 직지
인사동 금속활자와 직지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1.07.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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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연지민 부국장
연지민 부국장

 

서울 인사동에서 조선의 금속활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인사동 골목길을 정비하던 중 모습을 드러낸 금속활자 1600여 점이 지난달 30일 공개돼 국민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수량도 수량이지만 15세기에만 쓰였던 한글 금속활자도 포함돼 있어 학계 이목을 끌고 있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시기에만 사용된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이번 발굴에서 실물로 확인되면서 조선의 활자문화 역사와 인쇄문화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란 예단도 나오고 있다.

이번 유물 발견을 두고 일각에선 기적이라고 말한다. 누가, 어떤 연유에서 금속활자를 항아리 속에 보관해 묻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글과 활자역사의 유물이 빛을 보게 되었으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더구나 문헌 기록으로만 남은 물시계 관련 부품과 천문시계까지 발굴되었으니 유물의 출토도 우연만은 아닌듯싶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1443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한 한국 고유의 문자체계를 설명한 책이다. 이 책에 사용된 독특한 형태의 한글 금속활자 발굴로 볼 때 최소한 1446년 이전에 만들어져 사용된 금속활자라는 점이다. 이는 구텐베르크가 1440년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와 인쇄술을 개발한 무렵과 비교해도 더 빠른 시기라는 점에서 세계 금속활자 역사를 증명하는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조선이 기록의 나라, 활자의 나라라는 것은 수많은 기록이 증명해왔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만 해도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직지), 승정원일기, 해인사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 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등은 우리 선조가 남긴 빛나는 유산이다.

그럼에도, 조선의 금속활자나 인쇄문화는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밀려 있던 게 사실이다. 지식의 공유 측면에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가 인류의 삶에 혁명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우리의 금속활자와 인쇄문화는 평가절하당했다. 지극히 서양인 관점에서의 사고방식과 논리에 밀려 한국의 우수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것이다.

실제 미국의 유명 시사잡지 `라이프'가 `지난 1000년 동안 있었던 사건 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100대 사건'을 설문 조사했을 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 1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금속활자의 발명은 역사상 위대한 사건이라는데 모두 공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한국(조선)의 이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특히 `직지심체요절(직지)'의 고장 청주는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선 책의 역사를 내세우고, 조선의 활자기술이 서양으로 전파되었음을 증명하고자 여러 연구를 진행해 왔지만, 그 성과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세계가 인정한 국가 보물임에도 여전히 `직지'를 청주로 한정 짓고, 불교경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유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가 서양에서 종교혁명과 산업혁명을 일으킨 변화의 축이었다면, 조선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세계가 지식사회와 정보사회로 나갈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했다. 40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유물들이 한국의 르네상스를 이룬 세종대왕의 업적뿐만 아니라, 금속활자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이번 금속활자의 대량 발견을 계기로 직지의 위상도 높여야 한다. 청주의 직지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직지로, 세계의 직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깊이 있는 연구와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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