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과 닻
돛과 닻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1.07.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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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항구에 배 한 척이 닻을 내린다. 물살에 일렁이며 바람을 탄다. 쉬지 않고 달려온 배도 항해로 지친 몸을 쉬고 있다. 먼바다를 응시하는 선장의 얼굴도 모처럼 여유로워 보인다. 헐헐한 숨을 길게 내뱉는다. 그의 염염한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도 미소롭다.

버블그린호는 10년 전 오늘, 첫 항해를 시작했다. 나침반도 없이 혼자서 망망대해로 나선 그는 이 배의 선장이다. 미심쩍어하는 아내에게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는 쳐놓고 얼마나 막막하고 불안했을까. 키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할지, 어디에 암초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길이다. 바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아득했을 것이다.

그때의 바짝 긴장된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걱정이 가득한 눈길로 고물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쫓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던 그녀였다. 그를 사지로 내몬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재산인 양 지키던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선택한 일이라서 더 마음이 저렸다. 훗날, 자존심을 버리고 자존감을 택했음을 알고 감동했다.

세월을 훌쩍 넘긴 그녀가 소리 내어 운다.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봄눈처럼 녹아 눈물로 터졌다. 눈물도 맛이 있다고 했던가. 감정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한다. 지금 내 눈물은 달달한 맛이다. 버블그린호의 귀항은 만선의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장인 그이와 나는 처음으로 느끼는 희열이 아까워서 아주 조금씩, 천천히 음미하고 있다.

긴 항해의 여정이 어찌 순탄하기만 했으랴. 그이는 청소라는 직업이 편견에 가려 무시당하고 온 날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부들을 상대로 하기에 마찰이 잦을 때마다 힘들어했다. 원래 청소란 답이 없다. 아무리 깨끗이 한다 해도 트집을 잡으려면 끝이 없는 법이다. 애쓴 노력에 대한 대가는 잔인했다. 한 푼도 새로운 시기에 못하겠다는 선언을 눌러 참는 그이에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험은 쌓여 나침반이 되어주지만, 아직 초기라 결단이 필요했다. 차마 말 못하는 그이다. 어쩌면 나의 결정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작은 것은 과감히 버리자고 제안했다. 개인이 아닌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일만 하기로 했다. 벌이는 줄어도 느리게 가기로 한 것이다.

배에는 돛과 닻이 꼭 필요하다. 둘 중의 하나라도 없으면 항해를 할 수가 없다. 한 자리에 머물거나 정착하는 역할을 하는 닻과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하는 돛이다. 아무리 닻이 올라가도 돛이 오르지 않으면 배는 제자리에 머문다. 또한, 돛도 마찬가지다. 저만 올라 활짝 펼쳐도 닻을 올리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렇듯 배는 닻과 돛이 제 역할을 다해야만 제대로 항해할 수 있다. 가족은 한 배에 탄 사람들이다. 선택으로 만난 우리 부부와 선택의 여지없이 인연으로 만난 아들이 모여 맺어진 나의 가족이다. 닻이 되어 흔들리지 않게 해준 그이와 돛이 되어 활짝 펴고 바람을 가르고 나아가는 아들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 난항을 이겨내며 서로 소중함을 알아온 서른 해를 넘긴 시간들. 그렇기에 더 값지다.

버블그린호도, 가족선(船)에도 만선이다. 아들이 큰일을 마치고 소원하던 좋은 소식을 안겨주어 기쁨이 두 배로 왔다. 막대 사탕을 빨아 먹듯 아끼며 이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이 사탕이 아주 천천히 녹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입 안 가득 느껴지는 단맛이 앞으로 더 나아가는 힘이 되기를 바라본다.

다시 만선을 꿈꾸며 버블그린호가 출항한다. 아들도 새로운 길로 첫발을 떼어 놓는다. 이제 한숨 놓은 아들도, 선장의 얼굴도 미소가 가득하다. 둘을 배웅하는 나도 빙시레 웃는다.

고동치는 버블그린호여! 돛을 높이 올려라. 또다시 출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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