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기억
여름의 기억
  • 박윤미 충주노은중 교사
  • 승인 2021.07.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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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박윤미 충주노은중 교사
박윤미 충주노은중 교사

 

여름날 추억 중 꼭 다시 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비를 맞는 것이다. 갑작스런 소낙비를 만난 어느 날, 비에 젖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가방을 들고 뛰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당연히도 이내 흠씬 젖고 말았다. 그러나 다 젖어버리자 나는 더 이상 젖는 것이 두렵지 않아졌다.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에 연신 눈을 찡긋거린다. 빗줄기가 세찰수록 재미지다. 차라리 정면으로 맞서보자고 얼굴을 들었다가 화살처럼 꽂히는 빗줄기의 공격에 깜짝 놀라 항복하여 고개를 숙였다. 어느 여름, 뜨거운 대지를 식히는 찬 빗줄기를 온몸으로 온 얼굴로 맞은 그 순간이 나는 그립다.

둘은 개울에서의 놀이다. 낮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 개울물을 튀기며 왁자하니 물싸움을 했었고, 어느 밤에는 엄마 따라 동네 아낙들과 개울로 목욕을 갔었다. 차가운 물에 한 발씩 들어설 때, 물 한 바가지 끼얹을 때 부르르 신음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즐거워하던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개울물이 잔잔히 흐르다 자갈 위를 지날 때는 작게 솟구치고 좀 더 큰 바위를 만나면 굽이쳐 돌며 리듬 있게 흘러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쪼랑쪼랑 물결 소리가 귀에 들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하얀 살결들이 어찌 그리 잘 보였던지, 신기한 일이다.

마지막은 마당에서 자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을 둘러싼 돌담 안의 사방에는 꽃들과 딸기, 앵두, 고염 나무 같은 것들이 계절마다 피고 졌다. 마당 중간쯤에 심은 포도나무 넝쿨이 지붕으로 올라가고 그 아래 널찍한 평상이 놓여있어, 여름엔 그 그늘이 놀이터가 되고 식탁이 되고 잠자리가 되었다. 아빠는 나무 두 개에 고무줄을 달아서 애벌레 잡는 도구를 여러 개 만들어주셨다. 손가락만 한 초록빛 애벌레를 잡아야 하는 끔찍한 과제도 친구들과 하면 긴장감 넘치는 특별한 놀이가 되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할머니가 어느 날 혼잣말처럼 하신 말씀, “꼭 엊그제 같다.”, 이제 엄마가 아련한 듯 해주시는 말씀, “꼭 엊그제 같다.”, 어느새 커버린 내 딸들을 보며 나도 이제 하게 되는 말, “어쩜 꼭 엊그제만 같다.”

그리운 추억 목록 중에서 지금도 실행 가능한 것이 무엇일까 가늠해 본다. 소나기를 피하지 않고 맞고 있다면 사람들은 감기 걸릴까 걱정할 것이다. 동시에 또는 그보다 앞서 내 정신 상태도 걱정할 거 같다. 개울에서 목욕하는 것 또한 같은 의심을 받거나, 때로는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을 거 같다. 그러나 워터파크에서 노는 것으로 대체하고 싶지는 않다.

하늘을 이불 삼아 자보는 것은 그나마 가능할 거 같다. 처녀 귀신, 달걀귀신, 도깨비불 이야기도 다시 해보고, 별들과 개구리 오는 소리도 초대하고 싶다. 하나를 상상하니 그 여름을 살아있게 했던 더 많은 것들이 함께 떠올라 빙그레 행복해진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고, 나도 엄마가 되고 나이가 들었다. 시간은 아코디언의 바람 상자처럼 겹겹이 접혀서 서로 맞닿을 듯 가까워지기도 하고 다시 멀어지며 길게 늘어지기도 하며 멜로디를 만든다. 삶은 연속되는 크고 작은 순환의 겹이다. 그러나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는 일은 없다.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적은 없다. 단 한 번이다. 추억은 지나왔으므로 생각하는 것들, 거꾸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오늘이 먼 어느 날의 추억이 될 것을 생각하니 오늘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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