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만년필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1.06.3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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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 내 손안에는 지금 뚜껑에 영문으로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 만년필이 있다. 아들이 선물해 준 것이다. 서랍 속에서 굴러다니던 애들이 쓰던 볼펜들을 그냥 버릴 수도 없고 해서 일일이 확인해 나오는 것만 모아서 쓰고 있었는데 그걸 봤던 모양이다. 지난주에 작가라면 만년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며 잉크와 함께 사 온 것이다.

잉크병을 보니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가 생각난다. 지금은 태교로 영어 공부를 시키는 시대지만 그땐 중학교에 올라가서야 영어알파벳을 처음 배웠다. 영어 공책에 대문자와 소문자를 펜글씨로 열 번씩 써 오는 게 숙제였다. 생전 처음 써 보는 펜촉으로 생소한 글자를 쓰는 일이 익숙할 리 없었다. 그림 그리듯 따라 써봐도 번지기도 하고 영 태가 나지 않았었다. 또 잉크를 엎질러 흰 교복이 얼룩지는 일도 다반사고 궁여지책으로 스펀지를 집어넣어서 쓰긴 했지만, 유리로 된 잉크병이 떨어져 박살이 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제법 깔끔하게 쓰게 된 후로는 영어뿐 아니라 펜글씨로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거나 일기 쓰기를 즐겼다. 사각거리며 펜촉이 종이를 긁는 그 소리와 느낌을 좋아했었다.

보통은 펜촉을 볼펜 뒤 깍지에 끼워서 썼는데, 펜촉으로는 잉크를 계속 찍어가며 글씨를 써야 했기 때문에 영어 수업이 있는 날에는 잉크병을 가지고 학교에 가야 했다. 행여 뚜껑이 덜 닫혀 가방 속에서 잉크가 샐까 봐 항상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우리 반에 만년필을 쓰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만년필은 한번 잉크를 채워 넣으면 이름대로 정말 오래 쓸 수 있어서 번거롭게 잉크병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 어찌나 부럽던지, 그리고 그 만년필이 참 신기했었다.

언젠가 책에서 만년필에 얽힌 법정 스님의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스님은 촉이 아주 가는 것으로 글씨 쓰기를 좋아하셨는데, 그걸 알고 지인이 일본에서 촉이 가는 만년필을 사다 선물했다. 고마워하며 한참을 그것으로 글을 잘 써 오던 중 파리에 갔다가 우연히 똑같은 만년필을 발견하곤 하나를 더 사 왔단다. 그런데 그 후로 처음 만년필에 대해 가졌던 살뜰한 마음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결국 나중에 산 만년필을 다른 스님에게 선물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소중함이 생기더랬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그 하나만을 가질 것이지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며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거라고도 하셨다. 사실 요즘은 물건이 너무 흔해서 그런지 가진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 역시도 자꾸만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걸 욕심내고, 충분히 가졌으면서도 무언가에 늘 갈증을 느끼며 허덕이는 삶을 살아가곤 한다. 소로우처럼 단순하고 간소한 삶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만족하며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제 깜냥 이상은 욕심내지 않고 또 언제든 기꺼이 비울 준비가 되어 있는 만년필이야말로 단순하고 간소한 성품을 지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청빈한 마음을 배울 수 있어서 더 좋아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아들이 사준 이 만년필 하나로 필요 충족이다. 소중한 첫 마음을 잊지 않고 오래 아끼며 열심히 글을 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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