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강가에서
6월, 강가에서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6.2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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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거뭇한 밤에 장대 같은 비가 퍼붓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전기가 끊어져 칠흑 같은 어둠에 1시간이나 갇혀 있었음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살아있음을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뜨거운 한낮의 치열함 때문이겠지요. 저녁밥을 먹자마자 잠에 취한 탓에 자연의 도발도, 인공의 어긋남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시간의 흐름도 세상의 변화도 깨닫지 못했으니, 눈을 뜨고 바라보는 일과 귀를 열어 듣는 일은 살아있음을 비로소 확인하는 소중한 순간입니다.

비가 그친 뒤 맑은 새벽길에서 지난밤의 우여곡절을 짐작합니다. 시냇가 둔치에 이어진 산책로에 물이 넘쳐흘렀던 흔적이 남아있고, 무심천을 건너는 낮은 다리에는 거센 물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다니던 풀들이 뿌리째 걸려 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는 줄도 몰랐던 밤을 지내고 강가에 드러누운 수평의 풀잎을 보며 지나온 6월을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6월은 김수영 시인의 계절입니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의 노래가 사무치는 시간들입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르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전문> 세상을 요동치게 하려는 정치의 섣부른 뒤척임이 울끈불끈 튀어나오던 6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 6월의 수많은 죽음의 비극 앞에서 시인 김수영을 잃은 6월이 유난히 시퍼런 것은 폭우에 휩쓸려 땅바닥에 드러누운 풀들의 서러움 때문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사랑은 호흡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이 순결하면 순결할수록 더 그렇습니다. 기도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사랑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김수영 산문. 「요즘 느끼는 일」中> 다시 김수영을 추억합니다.

말들의 성찬이 넘쳐나고, 살리는 일보다 상대를 죽이는 일에만 골몰하는 날카로운 언어들로 세상이 뒤덮이는 정치의 계절이 훌쩍 앞당겨진 한반도에서 올해 6월이 영영 우리와 헤어지려는 순간입니다.

강가에 줄지어 심어 놓은 무궁화나무에 성급한 무궁화 꽃은 피고, 개망초 꽃 너울은 새벽 여린 빛을 받아도 서러운 가슴을 달래지 못하는 하얀 물결입니다.

여름꽃 수국은 걷는 길을 따라 하얗고 푸르거나, 때로는 분홍과 보랏빛으로 그때그때 색깔을 달리합니다.

겨울이 되어도 절대로 얼어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6월의 강가에서 사랑과 죽음이 서로 교차하는 새들의 비상을 봅니다, 그 날갯짓의 끄트머리쯤 어딘가에 있을 김수영의 `자유'를 여태 우린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진 비와 바람을 만나 풀처럼 눕다가도 스스로 일어나고, 꽃처럼 찬란하게 피었다가 사라지는 6월의 숱하게 처절한 죽음에 정치가 단 한 번이라도 부끄럽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무너졌다가도 금방 일어나는 생명의 이어짐. 낯선 계곡이거나 포탄으로 천둥벌거숭이가 된 고지에서 죽음으로 자유를, 그리고 조국을 위해 당당하게 맞선 이들은 그저 보통사람들이었습니다.

최루탄 자욱하고 매캐한 교문 앞이거나 폭염에 녹아내릴 듯한 아스팔트 위에서 장렬하게 6월의 죽음으로 맞선 민주영령들의 영혼은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한 보통의 사람들 사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6월의 일터. 그 끝내지 못한 위태로운 밥벌이의 고단함 속에서 우리는 올해 절반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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