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늙음에 대한
첫 늙음에 대한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1.06.2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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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미국의 산업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26세)는 1979년부터 3년 동안 80대 노인으로 변장하고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불편을 겪는지 직접 체험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던, 노인은 소비자가 아니라는 잘못된 시각을 개선하고 많은 제품 디자인에 노인의 특성을 녹여 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것은 그녀가 노인학자라는 것이다. 나이 듦이 이제 학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현실에 늙어가는 것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대인가보다. 그리고 언제였는지, 젊은 연예인 부부에게 80대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서로 만나게 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한동안 울먹였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내가 갖고 있는 그림책 중에 나이 듦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지. 생각보다 꽤 많았다. 그중에 얼마 전, 작은 책방 개업식에 갔다가 사 온 책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할머니의 여름휴가> 안녕달 작품이다. 독특한 소재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따뜻해서 좋은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아담한 집에 할머니와 강아지 메리가 TV를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름휴가를 다녀온 손자는 바닷가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엔 꼭 할머니와 가겠다고 하자 분주하게 장 봐 온 것으로 주방일을 하던 엄마는 `할머니는 힘들어서 못 가신다니까'라는 말로 일축한다. 착한 손자는 엄마의 말에 바닷가에서 주워 온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주며 파도 소리를 들려준다. 할머니 집에서 일이 끝난 엄마는 앉지도 않고 집을 나서고 손자는 할머니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바닷가에서 주워 온 소라 껍데기를 준다. 여기서부터 판타지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할머니와 강아지 메리가 소라 안으로 해수욕을 떠나는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오후, 옛날 수영복과 커다란 양산, 가벼운 돗자리, 그리고 수박 반쪽을 챙겨 메리와 함께 소라 안으로 들어간다.

할머니와 강아지 메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 할머니의 여름휴가를 손자가 놓고 간 소라 껍데기가 챙겨주니 내 마음도 좋다. 소라 안의 바닷가는 한가롭고 신비롭다. 갈매기들과 수박을 나눠 먹고 물개들과 뒹굴 뒹굴 일광욕을 하며 나른한 여름 한낮을 보낸다. 그리고 찾아간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다 `바닷바람 스위치'를 사 갖고 집으로 돌아온다. 고장 난 선풍기에 끼워 스위치를 누르자 바닷바람처럼 시원한 바람이 할머니 집 작은 거실을 가득 채운다.

100세 시대를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라고 한다. 유엔이 2009년 내놓은 `세계인구 고령화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 단어다. 아울러 팩트 체크를 해보자면 요즘 환갑잔치는 없어 진지 오래고 칠순이 되어도 노인정에 가면 어린애 취급이라니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성큼 다가온다. 드는 나이와 쇠락해가는 육체의 진실 앞에 작아질 수밖에 없는 나이 듦은 이제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은 그림책의 할머니처럼 여러 일에 소외되거나 스스로 가두는 일이 점점 늘어날지도 모른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말했다. `나이를 먹어서 즐기지 않는 게 아니다.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를 먹는 것이다.'라고. 산다는 것은 물음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 안에 물음과 호기심 가득한 윤기 나는 눈동자만이 현재의 삶을 즐기고 희구할 수 있다. 첫 늙음의 시간이 다가온다. 아니, 기준이 모호하니 이미 나의 첫 늙음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늘 처음은 새롭고 설레고, 기대 만발한 상상을 하듯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색다르고 아름다운 관점'으로 나를 챙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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