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이 익어갈 때
밀이 익어갈 때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1.06.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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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호밀밭이다. 인근에 있는 비행장활주로 옆 공터에 지자체에서 어느 해는 보리를 심기도 하고 도라지,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을 심어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예쁜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나면 많은 사람이 꽃구경을 하며 산책을 하고,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사진을 찍기도 한다. 올해는 밀을 심어 봄부터 푸르른 밀밭이 볼 때마다 시야를 시원하게 해주더니 어느새 이삭을 살찌우며 누렇게 밀이 익어갔다.

밀과 보리는 씨를 뿌리는 시기나 자라는 모습이 비슷하다. 평야가 넓지 않은 산간지방에서는 쌀이 부족하므로 밀과 보리를 밭에 심어 보리쌀로 밥을 지어먹고 밀가루로 국수, 수제비 등을 해먹었으니 예전에는 친숙한 곡물이었다. 가을에 심어 초여름에 수확하니 이모작이 가능한 작물이라 더러는 논에도 심어졌다.

어찌 푸른 싹을 여리다고만 할 수 있을까. 겨울의 문턱에서 싹이 올라오기 시작하니 새싹은 두터운 눈을 이불 삼아 덮고 칼바람이 불어오는 들판에 납작 엎드려 온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다. 얼고 녹으며 뿌리가 들떠 생명력을 잃을까 싶어 밀, 보리밭을 밟아 주기도 했었다. 이파리 끝이 얼어 누르스름하게 변하기도 하지만, 해동과 함께 새잎이 나고 무럭무럭 자라 푸른 물결을 이룬다. 이 때문일까. 푸른 물결을 마주하면 마음이 숙연해졌다.

밀과 보리는 서민들의 헛헛함을 채워주었다. 산촌의 초여름은 보릿고개라는 춘궁기를 힘겹게 넘긴 터라 집집마다 밀과 보리가 익어가길 기다려왔다. 타작마당이 불볕 같아도 까끄라기가 땀에 젖은 몸에 달라붙어 몹시 따가워도 축제의 마당이었다. 어른들은 힘겨운 타작을 마치고 시원한 우물물로 등목 한 번이면 모든 것이 해소되는 듯했다. 햇보리 쌀에 뽀얗게 분이 나는 햇감자를 섞은 밥은 고소하고 맛났다. 밀방아를 찧어오면 엄마는 달달한 팥소를 넣고 찐빵을 만들어 주셨다. 이스트나 막걸리를 넣어 부풀어 오른 찐빵처럼 모두의 가슴도 부풀어 오르는 계절이 이맘때가 아니었을까.

맛있던 찐빵이 언제부턴가 탐탁지 않게 느껴졌다. 밀농사를 짓지 않는 성희네 찐빵을 본 이후부터였지 싶다. 하얀 밀가루로 국수를 밀고, 찐빵을 만들어 놓으면 영락없이 하얀 분가루를 바른 곱디고운 여인의 모습 같았다. 칙칙한 색부터 눈에 거슬리고 거친 질감도 도저히 새하얀 성희네 밀가루 음식에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철없는 마음에 그저 변함없이 밀농사를 짓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시나브로 밀밭이 드물어지고 우리 집에도 새하얀 밀가루 포대가 들어왔다. 보드랍고 고운 밀가루 음식에 젖어 우리의 입맛은 곧 길들여졌고 우리밀의 소중함은 기억에서 쉽게 잊혀져갔다. 서구화된 식단의 영향을 받아 아침밥 대신 빵이 식탁에 오르는 집도 많아졌다. 배고픔을 벗어나고 먹거리가 넘쳐나지만 고운 밀가루가 건강에는 오히려 좋지 않다보니, 거친 밥 거친 먹거리에 다시 눈길이 가고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밀과 보리를 특화작물로 농사를 짓는 농가가 간혹 있지만 도정이나 판로 등 여건에 어려움이 많은 듯하다.

누렇게 익어가는 밀밭은 수많은 발길을 불러왔다. 밀밭은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아가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을 회상하는 곳이 되기도 하니 인기 만점이다. 푸른 밀 밭가를 걸을 때는 마음도 푸르러졌고 누렇게 이삭을 익혀가는 밀밭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넉넉한 마음도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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