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을 맞았습니다
백신을 맞았습니다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6.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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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코로나19 백신을 맞았습니다. 어느 사이 `어르신'의 범위에 포함되었는지 씁쓸하기도 했으나 친절한 접종 예약 안내에 따라 약속을 정했습니다.

날카롭고 예리한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이물감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백신 접종 당일 주사바늘을 보며 유난히 날카로운 것에 찔리는 것을 두려워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어릴 적 내 아버지는 양봉을 하셨습니다. 취미로는 조금 벅차지만 그렇다고 전업으로 인정하기도 어색한, 요새말로 투잡에 가까운 규모였습니다. 그럼에도 한창 꽃이, 특히 아까시나무 꽃이 만발할 때면 본업보다도 더 열심을 기울이신 탓에 꿀을 따는 날에는 새벽부터 온가족이 벌통 앞으로 동원됩니다.

벌레에 물리고 날카로운 침에 찔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공포에 가까웠던 어릴 적 나는 어김없이 벌침에 몇 방 쏘이고, 적어도 사흘쯤은 퉁퉁 부은 몸으로 가려움과 씨름해야 하는 꿀 따는 새벽이 죽도록 싫었습니다.

그 어린 시절 나는 아주 작은 몸을 가진 벌이 수천, 수만 번의 고된 노동을 통해 얻은 양식을 하루아침에 빼앗아가는 (아버지를 포함한)인간의 욕심을 무척 원망했더랍니다. 게다가 꿀을 훔쳐가는 침입자와 맞서 싸우기 위해 벌침을 쏜 벌은 결국 살아남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는 잔인함에 홀로 몸서리치기도 했습니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주사기가 내 왼쪽 팔뚝을 찌를 때 나는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환난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 있는 희망의 역사적 순간을 놓치고 만 것인데, 미디어의 호들갑과는 달리 일반적인 주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신을 맞고 난 뒤 15분의 안정을 취하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이어지면서 오랜만에 평화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날카로운 주사바늘을 통해 내 몸 안으로 뚫고 들어 온 아주 적은 분량의 투명한 액체에는 벌써 2년째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19의 종식을 희망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여과 없이 횡행하는 각종 부작용에 대한 호들갑에도 집단면역을 위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긴 행렬을 만드는 국민들의 공동선이 있습니다. 나도 괜찮아지고 내 가족도, 우리 이웃과 지역사회, 그리고 온 나라 만백성이 두루 괜찮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숭고한 기도가 있습니다.

날카롭고 예리한 주사바늘을 통해 내 몸 안에 들어 온 맑은 한 방울의 액체에는 뜻하지 않게 창궐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한 애틋한 애도가 담겨 있습니다. 참아야 하고 견뎌야 했으며, 떨어짐과 격리됨에 순종했던 우리 모두의 배려와 인내를 찬양하는 인간승리의 또 다른 위대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맑은 한 방울에는 지쳐도 결코 지칠 수 없는 의료진의 헌신과 보건 당국의 눈부신 사투, 그리고 도탄의 위기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초를 다투며 백신개발에 성공한 연구진의 열정 또한 부족하지 않게 담겨 있습니다.

백신 접종에 따른 후유증의 이상 증세가 부담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여름에 다다른다는 절기 하지를 며칠 앞둔 한낮의 햇살은 그날따라 유난히 맹렬했습니다. 때 이른 폭염을 뚫고 <공무수행. 청원보건소>라고 적힌 하얀색 승합차가 큰 길가에 정차했고, 그 차에서 시뻘겋게 얼굴이 상기된 한 여성이 냉장상자를 들고 급하게 내립니다. 백신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없는 병원을 순회하며 때 맞춰 공급하는 공무원의 숨 가쁜 구원의 순례길인 모양입니다. 그때 나는 보았습니다. 냉장상자를 들고 달음박질하는 그녀를 뒤에서 비추는 긴 햇살이 둥글게 피어나는 장엄한 아우라를 마침내 목격하였습니다.

백신을 맞고 나는 한결 평화로워졌고,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커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카롭고 뾰족한 벌침이 두려웠던 어릴 적 기억은 백신을 내 몸 안에 밀어 넣은 주사바늘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자연을 마구 침범하고 빼앗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따끔한 일침. 나는 백신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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