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내준 밥값
미리 내준 밥값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1.06.20 1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밥 한 끼 해요”

밥을 같이 먹는다는 일은 그만큼 그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고 친밀도를 높이려는 애정이며

관계 형성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다. 적어도 밥 한 끼 같이 먹을 정도라면 무심히 스치는 인생의 나그네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예전엔 `밥'이라는 의미는 주요 생존 수단으로서의 끼니 역할이었다. 그래서 만나거나 헤어질 때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끼니 꼭 챙겨드세요.”가 일반화된 인사치레였다. 밥심으로 사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밥이 생존과 관련된 물질적 의미로서의 끼니 기능이라면 오늘날 `밥'이라는 의미는 사회 인적 관계망을 구축하려는 연결 고리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밥 한 끼 하는 일이 단순한 생존 기능이든 관계로서의 매개 기능이든 포지티브로서의 의미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요즘 생존의 의미, 관계의 의미에서 나눔의 차원인 사랑이라는 의미의 기능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나 역시 요즘같이 어려운 세상에서 예년보다 더 잦게 실천하는 인정 프로젝트 하나가 집밥 문화이다. 오래전 `한 끼 줍쇼'프로그램을 보고 착안하여 좀 더 친밀한 사람들과 만남이 있을 때면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만들어 먹는 집밥 문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단 입장료는 집에 남아도는 것을 재활용, 새활용의 차원으로 나눔 하거나 그냥 맨몸으로 출입하는 것으로 새로 산 것들은 반입금지라는 규정을 정했다. 그런 까닭에 웃을 일도 참 많이 생겼다. 어떤 사람은 손뜨개용 수세미 하나를 들고 오고, 어떤 사람은 잘 신지 않는다는 덧신 한 켤레, 어떤 사람은 콩 한 사발을 들고 왔다. 가장 기억나는 따뜻한 품목은 속옷이었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아 함께한 일행에게 넘어갔다.

이 일은 코로나 사태를 겪은 후 지구환경에 새롭게 눈 뜬 미니 멀 라이프 실천의 일환이며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다움의 문화를 잃지 않으려는 정 문화 실천의 일환이다.

지난번엔 동시집을 낸 후배가 있어 축하 겸 집으로 초대하여 열무와 갖은 채소를 넣은 비빔국수를 내놓았다. 후배가 밥값으로 들고 온 동시집 제목 《미리 내준 밥값》을 보는 순간 가슴이 훈훈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점에 밥 한 끼 값을 내놓는 일이란 얼마나 따뜻한 움직임인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미리 내놓은 밥값//미리내 식당 앞 표지판에/붙여놓은 종이들도/점점 늘어난다.

2인분 값 미리 냈어요/ 배고픈 분들 드세요.//휴가 나온 군인에게/비빔밥 2그릇//힘내세요/설렁탕 1그릇//알바 생에게 따뜻한 밥/한 끼 먹이고 싶어요. -(이묘신 동시,<미리 내준 밥값>)

언젠가 진은영 시인은 시인의 사회적 위치와 기능에서 시인이란 사람들을 연결하는 삶의 언어가 되도록 이 사회의 마지막 청자(listener)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런 맥락의 일환으로 이묘신 시인 역시 사람들 사이에 난 간극을 동시라는 매체로 연결하여 몽롱한 양심을 툭 쳐서 움직이는 마력이 있다. 아무 음식점에 들러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한 밥 한 끼 값을 내놓고 나올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그곳이야말로 신도 머물고 싶은 인간의 도시일 것이다.

화두로 던진 「미리 내준 밥값」은 한 번쯤 실천해볼 숙제로 남겨두고 우선 주말 농장에서 수확해온 상추와 쑥갓을 커다란 양파망에 담아 덜어갈 봉지와 함께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안 귀퉁이에 놓아두었다.

“주말 농장에서 수확한 유기농 상추입니다. 드실 만큼 예쁘게 덜어 가셔서 따뜻한 밥 지어보세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