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면
꽃이 피면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1.06.0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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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폐나 기관지염에 좋다는 아카시아 꽃을 따러 간다. 주렁주렁 매단 꽃으로 가지가 휠 지경이다. 일부는 효소를 담고 꽃봉오리는 가루에 살짝 묻혀 튀겨볼 요량이다. 나무 가까이 다가서자 윙윙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젖혀 보니 나만 꽃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벌써 수많은 벌이 꿀을 따고 있다.

꽃과 벌은 서로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관계로 살아가고 있다. 수없이 많은 벌이 꽃술마다 드나들며 힘찬 날갯짓을 하는데도 작은 상처 하나 남기지 않는다. 꽃은 벌에게 꿀을 주고, 벌은 꽃에서 양식을 구하는 대신 가루받이로 열매를 맺게 해준다. 이쪽이 필요한 것을 얻으면서 저쪽이 필요한 것은 내어주는 자연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어릴 적 학교 다닐 때 오월이면 아카시아 꽃길을 걸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에는 손만 뻗으면 포도송이 같은 흰 꽃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꽃은 때로 간식이었고 놀잇감이었다. 그립기만 한 엄마가 언제쯤 올까 기다리며 잎을 하나씩 떼어내기도 했다.

도시에서 장사하는 아버지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좀처럼 시골집에 내려오는 일이 없었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온 마을을 감싸던 5월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할머니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내 걱정을 했고 입학할 때쯤에 데려가겠다며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곁에 누워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던 아버지의 손길에는 애처로움과 사랑, 걱정이 묻어 있었다.

내가 열세 살이되 든 해 할머니가 별나라로 가시고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버지, 그 이름은 내게 너무도 생소했다. 부르기는 해야겠는데 입 밖으로 그 단어가 나오지를 않는다. 저만치 걸어오는 아버지가 보이면 나는 입을 달싹거리며 열 번 넘게 연습한다. 가까이 왔을 때 “아버지” 겨우 나온 말,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듣지 못한 아버지가 내 곁을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면 또다시 연습을 한다. 자연스레 아버지를 부르기까지 한참 걸렸다. 너무 아픈 기억이라 스스로 망각하려고 애를 썼다. 꺼내 볼 용기가 없어 기억 밖으로 밀어냈던 유년의 추억, 아카시아 향기에 실려 예고 없이 아버지가 찾아와 가슴을 휘젓는다.

이제 아버지의 세상만큼 나이가 들고 보니 측은한 모습의 당신이 거기 계셨다. 새 보금자리의 가족에게는 내 존재만으로도 상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행복 속에서도 늘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 못했을 뿐 안쓰럽게 바라보던 그 눈빛은 분명 사랑이었다.

꽃향기가 온 마을을 감싼 고향 마을에 아버지가 다녀가신 그날처럼 오늘도 흐드러지게 꽃이 피었다. 여러 해 전에 할머니 곁으로 가신 아버지, 이젠 온전히 나만의 아버지가 꽃향기 속에 있다.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도 하다. 해마다 아카시아 꽃향기를 앞세우고 불현듯 찾아올 당신, 나는 환한 웃음으로 아버지를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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