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이 썩기 전에
고인 물이 썩기 전에
  •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 승인 2021.06.0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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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평소에 의식적으로 책을 많이 읽고자 한다.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해야 만 하는 일들에 할애하다 보면 주체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사실상 많지 않다.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작은 그 시간을 오락과 휴식으로도 쓸 수 있고, 그 행위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나 자신이 정체되는 것을 막는데 쓰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느껴졌고 그 수단이 바로 독서가 된 것이다.

지금의 이 자리에 앉기 위해 넘어야했던 모든 관문을 공식적으로 다 통과했다는 통보를 받은 최종합격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나도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이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는 성취감과 안도감 외에 마음 한구석에 몽글몽글 피어나던 생각 또한 아직도 생생하다. 더이상 그 어떤 이루어야만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시간에 쫓기며 동동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었다. 그 해방감은 임용 후 몇 년간 나를 자유롭게 했다. 말 그대로 공직생활의 자유함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선택사항이었을 뿐 꼭 해야 하는 의무사항은 직업적인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연애도, 결혼도, 취미생활도 하다못해 운전을 하느냐 마느냐 까지도.

그 후 몇 년, 바로 지금, 어떻게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아 가며 보내던 일상 한가운데서 문득 심장을 관통하는듯한 강력한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정년이 보장되어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혹은 아이가 둘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꾸준히 고인 물이 되어가던 나 자신을 너무도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시간은 흘러가고 나도 일상에 파묻혀 겨우겨우 휩쓸려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고인 물이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인 물.

그래서 오늘도 리모컨과 책을 두고 한참 내적 갈등을 하다 책을 든다. 손은 책을 들었으면서도 눈은 리모컨에서 한참을 떠날 줄을 모른다. 책과 텔레비전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뇌가 이분화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을 또 해본다. 그래도 다행인 건 몇 년간 의식적으로 펼쳐온 책들이 첫 한 장을 넘기면 자연스럽게 책에 빠져드는 습관을 가져다준 것이다.

신규교육을 받을 때 들었던 수많은 말 중에 뼈에 박힌 한 문장이 있었다. “여러분은 사무실을 나가는 순간 공무원티를 벗어버려요. 염색도 하고 그러란 말이야. 어딜 가나 나 공무원이에요 하고 다니지 말라고.”

공무원이 공무원티가 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랴, 단지 그 틀 안에 갇혀 젊음의 아름다움도 세상의 다채로움도 경험하지 못하면 안 되니까 해주신 말씀이 아닐까 하는 그 깊은 뜻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편다. 그 안에서 지금의 나와는 달리 혼자의 몸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누군가를 부러워도 해보고, 인생의 끝자락에서 젊음을 부러워하는 이의 애처로운 마음을 느껴보기도 한다. 내 안에 고인 물이 조금씩 조금씩 졸졸졸 새어 나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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