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잎과 누에
뽕잎과 누에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1.05.3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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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오월, 산야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진다. 밭둑에 있는 뽕나무에도 여린 새잎이 피었다. 막 피어나 보드라운 잎사귀에 윤기까지 반드르르 돌아 나물로 먹기에 맞춤한듯하여 뽕잎을 땄다. 몇 해 전 뽕잎 나물을 먹어 본 후 봄만 되면 유독 뽕잎나물에 마음이 가곤했다. 뽕잎은 담백하면서도 은은한 맛으로 처음엔 밋밋한 듯해도 한 번 맛보면 은근히 끌리는 맛이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탓이리라. 뽕잎 나물을 먹다 보면 누에 생각이 먼저 난다. 어린 시절 농가에서는 봄이면 한 집 건너 한집은 누에를 길렀다. 봄이면 수확되는 농작물도 없거니와 어디에서 푼돈이라도 나올 곳이 없는 궁핍한 시기이다. 농가에서는 한 달가량 양잠을 하려면 모내기나 곡식 파종 등 농사일과 겹쳐 일손도 바쁘고 힘든 일이다. 그래도 약간의 목돈을 얻을 수 있으니 집집마다 밤잠을 설치며 누에치기에 몰두했다.

누에씨(알)를 받아다 따뜻한 방에서 며칠을 기다려 부화시킨다. 누에가 알에서 깨어나면 이때부터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란다. 처음 알에서 부화한 누에는 여린 뽕잎을 곱게 썰어 주어야 한다. 누에는 4주정도 먹고 자고를 거듭한다. 두 번째 잠을 잘 때까지는 우리도 같은 방에서 누에와 불편한 동거를 한다. 어머니는 주무시다가도 일어나 뽕잎을 썰어 누에에게 주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이틀이 멀다하고 누에똥을 가려 주어야하고 누에가 커갈수록 먹는 뽕잎 양이 늘어나고 잠박(蠶箔) 수도 많아져 안방과 윗방까지도 누에가 차지하곤 했다.

나중엔 누에에게 방을 내주고 마루에서 잠을 자야한다. 잠결에 들리는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는 영락없는 빗소리처럼 들렸다.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누에는 잠잘 때 외에는 뽕잎을 먹는 것이 일과이니 몸집이 커가는 만큼 먹는 양이 점점 많아진다. 이맘때면 어머니는 우리 밭둑에 있는 뽕나무에 뽕잎은 긴급양식으로 남겨두고 멀리 산 뽕을 따러 가시기도 했다. 해거름에 어머니 마중을 나가 기다리다 보면 신작로 끝자락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큰 보퉁이가 둥둥 떠오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에 산더미 같은 큰 보퉁이를 이고 손에도 작은 보자기에 뽕잎을 들고 오신다. 아버지가 마중을 가시면 큰 보퉁이를 받아 지게에 지고 오시지만 나는 어머니 손에 들린 작은 보따리를 받아 이고 오는 것도 힘들었다.

누에의 변신은 끝이 없다. 잠자고 허물 벗고 그렇게 네 번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여 왕성하게 뽕잎을 먹다가 먹기를 뚝 그치고 고치 지을 준비를 한다. 소나무 가지를 잘라다 방안 가득 세워주고 누에를 바닥에 놓아주면 솔잎으로 올라가 하얀 실을 뽑아 고치를 짓는다. 스스로 집을 짓고 들어가 번데기가 되는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게 보였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실크원단의 재료로 쓰였다.

이제 농가에서 예전처럼 명주실을 얻기 위해 누에를 기르는 것은 보기 어렵다. 건강식품 등으로 누에의 효능이 알려지며 특화농업으로 누에를 기른다 한다. 지금도 시골 밭둑에는 오래된 뽕나무들이 남아있어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기왕에 뽕잎 나물을 접하게 되었으니 명주실은 못 뽑아내더라도 비단처럼 보드라운 마음 한 자락 보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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