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과 악(惡)
선(善)과 악(惡)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1.05.2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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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란 말이 있다.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의 한 구절로,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넘쳐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다. 적선지가 필유여경을 줄여서 적선여경(積善餘慶)이라고도 하는데,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후손들에게까지 복이 미친다는 뜻으로 확대해석할 수도 있다. 주역 문언전은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란 구절에 이어, 적불선지가(積不善之家) 必有餘殃(필유여앙) 즉, 착한 일을 하지 않고(악한 일을 행하면) 후손에게까지 재앙이 미친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남향집에 살려면 3대가 적선(積善)하여야 한다”는 속담과도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착한 일을 행하고, 악한 짓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불교에도 있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靜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즉,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두루 행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 불교라는 의미다. 기독교의 성경도 로마서 12장 21절을 통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유교, 불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에서 강조하는 `착한 일을 행하고 악을 짓지 말라'는 가르침은 너무나 당연해서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서도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공허한 외침이나 죽은 지식으로 끝나기 쉬운 측면도 있다.

0점 조정이 안 된 저울을 가지고는, 아무리 정확한 무게를 재려고 애를 써봐도 별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저렇게 세뇌를 당한 채 자신의 우물 속에 깊이 갇혀 있는 마음이라면, 아무리 선을 행하고 악을 짓지 않으려고 해도 별무소용(別無所用)이기 쉽다. 지공무사한 마음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 일 없이 정견(正見)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주견과 욕심을 비우고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 이웃을 제 몸처럼 여길 때,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닫고 중생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때, 비로소 0점 조정된 저울이 정확하게 무게를 달 듯,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고 선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자비로 넘치는 지공무사한 마음이 아니면, 자신의 정신적 만족이나 물질적 이득에 부합되는 것을 선으로 보고, 그 반대의 경우를 악으로 보는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하기 쉽다.

내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선이고, 내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악인가? 나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가? 선이라고 판단되는 것이 내 이득과 상반되고, 악이라고 판단되는 것이 내 이득에 부합될 때도, 나는 악을 멀리하면서 일말의 흔들림 없이 기쁘게 선을 행할 수 있는가? 내게 유리하고 득이 되면, 팔이 안으로 굽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을 선으로 왜곡하거나, 악인지 잘 알면서도 버젓이 그 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게 불리하고 손해가 되면 선도 악으로 왜곡하거나 모른 체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냉정하게 자문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하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죽은 지식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올곧은 세상을 앞당기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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