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가 아닌 잡초
잡초가 아닌 잡초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5.25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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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바깥공간이 비를 맞이하는 동안 세상은 만상이다. 제법 채워진 양동이에, 기왓장에, 에어콘 실외기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번갈아 고음과 저음을 내며 리듬을 탄다. 돌 위 튕기는 빗방울에, 우산이끼에 빨려 들어가는 빗방울은 무드를 잡는다. 내리는 빗방울 수가 돌확을 가득 메운 개구리밥 수보다 많다고 기세다. 제법 굵은 빗방울은 붕붕거리던 벌 소리에 휩싸였던 감나무 꽃을 떨군다. 빗방울 수에 맞춰 바닥에 떨어진 감꽃은 영화 관람의 단짝 팝콘인지 맥줏집 기본안주인 마카로니과자(?)인지 손가락 끝에 차지할 듯한데 겨우 새끼손가락에 머문다.

톡톡 노크를 시작으로 거세게 몰아치듯 기세였다 잠시 멈추기를 반복하며 연일 비가 제법 내렸다. 덕분에 일년 동안 내릴 비의 종류를 경험한 듯하다. 두두! 두두둑! 창문을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 양철지붕을 드럼 삼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 어지간히 두드렸는지 힘을 잃은 가랑비, 이젠 내리기를 포기하고 구름 아래 세상을 온통 미스트로 채우는 이슬비, 긴긴 시간 내린 비는 이젠 멈춘 듯 앞산의 운무와 거미줄은 꽁무니 줄을 따라 꿴 듯 구슬을 달았다. 그리고 구름 사이 부드럽고도 따스한 빛줄기.

비가 그친 뒤 빛줄기와 함께 세상을 뒤덮는 거대한 것들이 몰려온다. 아직은 고요한 듯하지만 이미 진을 치고 한순간에 지상으로 뛰쳐나올 태세를 끝냈다. 단순한 비(雨)가 아니라 비(肥)가 더해 땅을 적셨기에 부드럽고도 양분이 충만하다. 다음날 아침햇살과 함께 그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보통의 씨앗은 땅을 삐죽삐죽 비집고 빼꼼빼꼼 눈치를 보며, 아주 느린 타임랩스인데 이들은 신출이다. 전쟁의 서막은 비가 내리며 시작이고 이젠 격전의 장이 된다.

애지중지 보살핌의 대상이던 작물들은 전투력이 약하기에 온전히 1대 100, 아니 2대 무한대이다. 무한대군은 잡초다. 풀풀 먼지를 날리는 놈이 아닌 땅을 초록초록 뒤덮는 풀, 잡초다.

이른 봄부터 잡초의 싹만 보여도 제거했거늘 씨앗은 단체로 싹을 올렸다. 너무나 촘촘해 손으로 뽑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래도 단순노동에 익숙한 몸이라 초토화하며 전진이다. 쇠뜨기, 지칭개, 클로버, 엉겅퀴, 씀바귀, 쑥, 제비꽃, 비름, 질경이, 참나물 등 모든 게 식용이고 약재로 쓰이는 것들인데 필요해서 키우는 것에 방해(?)가 되는 녀석들을 싸잡아서 폄하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는 족족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판단의 머뭇거림이 손을 멈추게 한다. 고추밭의 부추, 부추밭의 샐러리, 샐러리밭의 상추, 상추밭의 아욱, 아욱밭의 하루나.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이곳저곳에서 한자리하는 녀석들 때문이다. 거슬린다. 이 녀석들은 잡초인가 작물인가? 이런! 여럿이 자라는 작물의 사이에서 한두 개씩 자라다 보니 씨를 파종한 작물보다 더 건강하게 자란다. 외형이 작고 볼품없지만 색, 본연의 향과 맛이 강하다. 이 녀석을 뽑아서 옮길까? 그냥 눈을 질끈 감고 뽑아 버릴까? 내가 정해준 틀 안에서 자라지 않는 녀석은 제거해야 하는 녀석이 맞겠지?

그런데 잡초가 아닌 잡초가 한숨 고르고 말한다. 나는 워낙 이 자리에 씨가 떨어졌고 시간을 기다렸다가 조건이 맞아 싹을 틔웠다. 때맞춰 김을 매주거나 비가림막 등의 보살핌은 애당초 없었다. 나는 누구의 틀에 있거나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온갖 비와 바람과 가뭄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자연의 이치에 맞춰 숨을 쉰다. 한자리에 오래 있지만 하늘과 땅에 손을 뻗고 바깥 공간의 만상과 함께 호흡한다. 나를 제거하더라도 상처와 슬픔과 눈물 뿐이었을 지라도 또 다른 내가 삶을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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