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중조차
해중조차
  •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 승인 2021.05.20 2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낮은자의 목소리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안녕하세요? 무문관 공안으로 보는 자유로운 선의 세계로 여러분과 함께할 괴산 청천면 지경리 청운사 여여선원 무각입니다.

이 시간에 탁마할 공안은 격외도리형인 무문관 제8칙 해중조차(奚仲造車)입니다.



月庵和尙 問僧 奚仲 造一百輻, 拈却兩頭 去却軸 明甚麽邊事.
(월암화상 문승 해중 조차일백폭, 염각양두 거각축 명심마변사)

월암 스님이 한 스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해중이 일백 폭이나 수레를 만들었는데 두 바퀴를 떼어내고 축까지 빼버리니 무엇을 밝히려 하는 것인가?



評唱(평창)



無門曰, 若也直下 明得, 眼似流星, 機如掣電.
(무문왈, 약야직하 명득, 안사유성, 기여체전)

만약 곧바로 알아차리면 눈은 유성처럼 재빠르고, 그 마음은 번개 불이 번쩍임과 같으리라.



頌曰 機輪轉處, 達者猶迷, 四維上下, 南東西
(송왈 기륜전처, 달자유미, 서유상하, 남북동서)

수레바퀴가 구르듯이 재빨라도 만족하지 마라. 도인도 오히려 헤맨다. 세상은 넓고도 넓다.



이 공안에서 월암스님은 대위 월암 선과선사를 말합니다. 월암선사는 바로 무문선사의 사조(師祖)가 되십니다. 여기서 해중은 수레를 처음 발명한 사람으로 황제(黃帝) 때 사람이라고도 하고 우 시대 사람이라고도 하나 그 연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월암선사는 대중을 모아놓고 해중이 만든 수레의 두 바퀴를 떼어버리고 축마저 제거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왜 그랬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수레는 짐을 나르기 위한 교통수단인데 그것을 만든 사람이 왜 축을 제거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대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월암선사가 고약한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바퀴가 없고 축이 빠진 수레를 일백 폭이나 만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해중이 만든 수레는 사람들이 짐을 싣고 잘 다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공안이 다 그렇듯이 不立文字(불입문자)요 言語道斷(언어도단)입니다. 머리로 문자의 문맥을 파악하려 하면 그곳이 死地(사지)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수레는 수레로서의 기능이 있고 천지는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공안에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중이 수레의 바퀴를 다 제치고 그 축까지 빼다 꽂고 하였다고 하여 그가 그것이 이미 수레인 줄 모르면 선지식이니 깨쳤다든가 견성했다든가 한들 그것은 한두 푼짜리 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언하에 척하면 알아차려야지 우물쭈물하다가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쥐구멍에 든 것처럼 캄캄하게 막혀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이 동서남북 상하의 이 광활한 세상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가 정신 빠진 잠꼬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도 부자유하지도 않은 것이며 무리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