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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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6.29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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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
정 규 호 <청주시 문화산업진흥재단>

한석봉과 추사는 각각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필이다.

조선 중종과 선조 대에 이르기까지 활약했던 석봉(石峯) 한호(1543년∼1605년)는 글씨로 출세하여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써 온 사자관(寫字官)의 역할에 충실했다.

당시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절이 파견될 때마다 대부분 예외 없이 서사관(書寫官)으로 동행했던 한석봉은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능했던 서예가로 기록되고 있다.

한석봉으로부터 비롯된 사자관체(寫字官體)는 이후 국가의 주요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寫字官) 특유의 서체로 정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은 그가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평하고 있으며, 예술적 가치보다는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음을 주장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두 번의 유배생활을 거치는 파란만장의 생활을 겪으면서 추사체를 완성함으로써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추사가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것은 추사체를 통해 정통적인 순미(純美), 우미(優美)가 아닌 추미(醜美) 즉, 파격의 아름다움과 개성으로서 괴(傀)를 추구한 본질에 있다.

미술사학자 강우방은 추사를 가리켜 동양미학의 궁극적 실현인 '대교약졸(大巧若拙, 크게 교묘한 것은 서툰듯 하다)'을 가장 성실하게 실천한 예술가로 칭한다.

기교의 극치가 졸(拙)이라는 기막힌 아이러니는 모방에서 그치지 않은 추사의 끊임없는 창의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필자가 정작 관심이 있는 것은 석봉과 추사의 예술혼과 그로인한 역사적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는데 있지 않다.

우열을 가리는 일이 불편부당한 두 서예가의 반열에 숨은 이야기의 힘을 인식하자는데 뜻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석봉에게는 맹모삼천지교에 버금가는 어머니의 극진한 교육열이 있다.

어두운 밤 희미한 촛불마저 끄고 글씨를 쓰는 아들과 떡을 써는 어머니의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교육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 흥미로운 소재가 되어 지금 21세기의 TV드라마에서 조차 원용된다.

또 하나, 한석봉의 묘갈(墓碣)에 적힌 탄생에 대한 일화는 이야기의 재미에 따른 대중성 확보를 시사한다.

'송도에서 났으며 점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서 났으니 낙양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는 일화는 정형화된 공문서의 서체라는 밋밋함을 재미로 탈바꿈시키는 역할에 톡톡히 기여하고 있다.

일찌감치 달궈지는 대선의 열기로 인해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있다.

예술적 가치가 21세기의 화두인 문화산업에 어느 정도 기여할지의 여부가 아직 미지수인 가운데 소위 스토리텔링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성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덕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적 보편성을 확보한 신화를 원형으로 하는 '반지의 제왕'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이야기의 힘'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어머니와 떡, 그리고 옥토끼와 종이값이라는 매개가 실린 이야기를 통해 교육열과 서예의 대가로서의 대표성을 확보한 한석봉의 일화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은 충분히 확보되고 있다.

다만 부풀리는 만큼 부풀려지는 말풍선과 '진정성' 혹은 창조적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생산적인 이야기의 힘과는 반드시 구별할 줄 아는 슬기가 필요하다.

이 땅의 모든 유권자들은 오는 12월까지 그런 고민을 소중하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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