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담그던 날
고추장 담그던 날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1.05.0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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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고추장을 담그러 친정에 가는 길이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가져다 먹기만 한 게 죄송해 진즉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남편도 시간이 있다고 해서 함께 일찍 나선 것이다. 친정까지는 자동차로 두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차창 밖은 바야흐로 봄이다. 길가로 만개한 벚꽃잎이 봄 풍경을 제대로 자아내고 있다. 산마다 분홍 연두 초록이 몽글몽글 한 폭의 파스텔화요, 나무들은 갖가지 초록의 반짝이는 새순들을 피워내고 있는 지금, 코로나에 빼앗긴 들에도 어느새 봄은 와 있다.

차는 이제 양평 나들목을 지나간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여기까지만 오면 나는 왠지 다 왔다는 착각을 한다. 중미산을 넘어 엄소리까지 가려면 족히 30분은 더 걸릴 텐데. 남편 말이 엄마 볼 생각에 그런 거란다. 부인할 순 없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다. 복(腹)중 열 달이 있으니까. 그게 우리가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반응하는 이유가 아닐까?

여덟 시쯤 친정에 도착했다. 간단히 한술 뜨고 남편은 화덕에 불부터 지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신이 있다던 말과는 달리 매운 연기만 꾸역꾸역 피어오른다. 눈물 콧물 범벅인 남편에게서 부지깽이를 받아든 엄마가 나무토막을 요리조리 움직여 가운데에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런데도 신통치 않다. 결국, 안 타는 것을 빼내고 남편이 뒤꼍에서 찾아온 마른 나뭇가지를 넣었다.

그제야 불길이 아궁이 뒤쪽으로 힘차게 빠지면서 타닥타닥 불꽃이 튄다. 아무래도 나무가 덜 말랐었나 보다.

질금 물 솥에 김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찹쌀가루를 넣어 눌어붙지 않게 저어주니 말갛게 삭는다. 이제 그대로 조금 더 끓여 한 김 식힌 후, 큰 그릇에 쏟아붓고 고춧가루와 메줏가루, 소주, 개복숭아 청을 차례로 넣어가며 덩어리 없어질 때까지 계속 휘저으면 된다. 그런데 끓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엄마가 아궁이에서 잘 타고 있는 등걸을 몇 개 빼냈다. 불이 세면 훌떡 넘치는 수가 있다면서. 불 또한 과유불급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항아리에 퍼담아 웃소금을 뿌려주면 끝이다. 이 웃소금이 3일 만에 다 녹으면 간이 딱 맞는 거란다. 이런 것들은 아마도 엄마가 살며 터득한 삶의 지혜이리라.

담아놓고 보니 얼추 두 항아리다. 이거면 몇 년은 넉넉하겠다며 흡족해하시는 엄마 얼굴에 건강한 주름이 흐른다. 요즘 읽는 책 “오래된 미래”에서 본 전통 라다크 노인의 사진 같다. 노인이 돼도 행복한 나라 라다크에선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곧 값진 경험과 지혜를 가졌다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엄마가 남은 날들을 지금처럼 매일 만 보씩 걷고,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작은 텃밭을 일구며 그들처럼 적극적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면 과정을 사진 찍고 기록한 오늘처럼 그런 엄마의 지혜를 나는 또 배워갈 것이다.

햇살이 좋고 바람 없는, 고추장 담그기엔 참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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