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일요일
모리와 함께한 일요일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4.2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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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늘 그렇듯, 초침에게 분침이 분침에게 시침이 앞지르기를 배려하며 열 번의 반복 끝에 주말이 돌아왔다. 이번 주말엔 어떻게 할까? 주말 전날 밤부터 고민이다. 주일의 저녁 여한이 없게끔 철저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복잡했던 순간순간의 기억을 떨쳐버리기에 몸을 혹사하다시피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래서 동이 트면서 다리는 몸을 앞지르고 몸은 머리를 앞지른다.

그런데 여느 주말, 주일이 아니다. 다리는 무기력하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걸터앉을 곳이라도 찾더니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털썩 주저앉는다. `머리가 나빠 몸이 바쁜 사람'이 이리저리 날아드는 펀치에 이젠 `몸도 나쁜' 아니 `아픈' 사람이 되었다.

잠시 잃었던 정신을 차리고 감았던 눈을 뜬다. 앉은 자리에 무언가 느껴졌다. 한 권의 책이다. 아내가 읽으려 가져온 책이다. 바람에 살랑이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의자 하나, 의자 위 책 한 권. 엉덩이를 들고 책을 쥐었다.

책 표지 제목도 보지 않고 첫 장을 열었다. 분명 책인데 글이 없고 동그란 원들이 율동에 맞추어 움직인다. 몽환적인 상황에 아직 정신이 안 돌아온 건가? 동그란 원은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내린 빛은 동글동글 밝은 원이 되고, 서로 엇갈리며 수묵의 농담을 뭉글뭉글 미끄러지듯 만들어 냈다. 아교로 갠 형광석채가 LED가 되어 빛을 발하는 듯하다. 결국, 책 한 장을 넘기지 못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원은 잠시 멈추었다가 갑자기 빨라지고 가끔 탭댄스의 스텝을 연출하였다.

빨라졌던 원이 멈추고 글이 나타났다. 살랑대는 바람이 한 장 한 장 넘겨주는 수고로움을 덜었다. 그렇게 책에 온전히 빠졌다. 가끔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가 바람이 다시 손에 살랑댄다.

일하기를 멈추고 의자에 앉아 더디게 가는 시간을 즐긴다. 드물게 경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스라이 사라지고, 둥지를 드나드는 곤줄박이의 기척뿐이다. 그리고 손에는 여전히 책이 쥐어져 있다. 뒷부분 몇 장을 남기고 책장 넘기기가 어려워졌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네.”

갑자기 영롱하게 움직이던 원과 선명하던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 선회하는 프로펠러 경비행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여 머뭇거리던 눈 안의 것이 만수위가 되었다. 만수위 눈물이 그마저도 더 흐릿하게 한다. 결국 보가 터졌다. 기꺼이 눈가를 탈출해 흘러내리더니 입가로 스며든다. 짭조름하다. 너무나 참고 참아 농도가 짙어진 걸까? 머리를 젖혔다. 머리 뒷부분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검은 가지가 뻗었고, 한여름도 아닌데 잎이 겹쳐져 갈맷빛이 맨 아랫부분에 자리하고, 서로 엇갈리며 만들어진 다양한 녹색이 흰색이 많이 섞인 파란색을 사이에 두었다. 바람에 살랑대는 잎 사이로 하늘이 선명했다가 이내 형태가 일그러지고 색이 탁해진다. 뜨거운 무언가가 귀속으로 든다.

살랑대는 바람이 눈가의 것을 어루만지고 간지럽히던 머리카락은 여전히 하늘거린다. 가쁜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 잠시 먼 산을 바라보면서 들었던 책의 마지막 몇 장을 쥐었다. 한 장을 넘기면 맺음말인데, 읽기를 멈추고 긴 시간 멍하니 먼 산에 눈을 준다.

매주 주말이면 혹독하게 학대하다시피 몸을 움직이며 잊고자 버티고자 했던 나는, 잠시나마 다른 시간을 가졌다. 나이가 들면서 나답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자아가 아닌 진아를 찾아가는 삶이어야 한다고, 산다는 것은 삶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던 주변의 이야기가 마지막 책장과 함께 고정되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려 할 때는 이미 지는 느티나무 꽃잎이 책장 사이 깊은 곳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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