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인간 시점
전지적 인간 시점
  •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21.04.21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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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며칠째 같은 꿈을 꾼다.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꿈에서 선명한 눈동자를 본다. 실제로는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보름쯤 전이다.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겼다. 주변에 별다른 건물이 없는 연수원은 밤이 되면 도심과 달리 캄캄해진다. 정신없이 일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창문 밖으로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달빛도 흐릿하다. 봄밤 공기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져 주섬주섬 책상 위 서류들을 치우고 퇴근 채비를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눈을 감고도 운전하겠다 싶을 만큼 익숙하다. 늦은 시간이라 반대편 차선은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다. 우리 쪽 차선에는 승용차 한 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퇴근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그야말로 한적한 밤길, 살짝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황갈색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운전대를 옆으로 꺾는데, 차창 너머 보이는 무언가는 하나가 아니다. `툭 투둑' 차가 좌우로 요동을 치는 순간, 뭉툭한 느낌이 온몸에 전해져왔다. 고라니와 부딪힌 것이다.

“아!” 외마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뒤따르던 차도 놀랐는지 비상등을 켜고 내 차를 앞질러 지나갔다. 뒷거울로 확인하자 두 마리의 고라니는 어느새 숲 속으로 사라졌다. 체구가 작은 고라니가 앞서고 뒤따르던 고라니는 제법 큰 것으로 보아 먹이를 찾아 새끼를 데리고 이동하는 어미 고라니였을 것이다.

널뛰듯 요란한 심장 박동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고라니들이 살았다는 안도감은 순간이고, 다쳤을 텐데 어쩌나 싶은 걱정이 밀려들었다. 상태가 어떤지 살피거나 치료를 도울 수도 없고, 미안하다고 전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우리나라에서 유해조수로 지정된 고라니는 국제적인 멸종위기종이기도 하다. 중국과 우리나라에만 서식 중인 고라니는 중국에 1만 마리, 우리나라에 10만 마리가량 살고 있다. 포식자들이 멸종하고 밀렵이 과거보다 줄어 우리나라에 고라니가 집중 서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순식간에 멸종될 수도 있다. 북미지역에 서식하던 여행비둘기는 50억 마리가 멸종까지 2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동물 찻길 사고를 막고 야생동물들이 도로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만든 것이 `생태통로'다. 그러나 야생동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환경영향평가 통과용으로 만드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실제로는 사람들의 산책로로 쓰이거나 오히려 생태통로 주변에서 더 많은 동물 찻길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실시한 코로나와 동물 찻길 사고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코로나로 통행이 제한되자 하루에 죽는 야생동물의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인간의 활동이 늘면 동물 찻길 사고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맞춰 멈춰 서는 차량들을 볼 때면 인간이 만든 약속의 위대함을 느꼈다. 신호를 지키고 법규를 준수하는 것이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입장에서만 생각해왔던 것이다. 밤에 불빛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멈추는 고라니의 특성을 안다면 규정 속도를 떠나 더 천천히 저속으로 주행하고 살펴야 했다.

길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꿈에서 본 눈동자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이제는 부디 회복되었기를 바라며 전지적 인간 시점으로 오만했던 나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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