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에서 벗어나는 길
업보에서 벗어나는 길
  •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 승인 2021.04.15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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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4월은 원불교의`대각개교절'이 있는 달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며 원불교 최대 경축일이다. 대각개교절이 있는 4월을 맞아 소태산 대종사께서 알려준 업보에서 벗어나는 길을 말하려 한다.

업이란 말이 있다. 더 흔히 쓰는 말이 업보이다. 정업은 정해진 업이라는 말이다. 운명과는 다른 말이다. 인과를 말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를 말하는 것이니 종교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나 미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원인이 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결과가 있다는 사실만은 모두 인정할 것이다. 과거에 내가 행했던 원인이 지어놓은 업이고 그 원인으로 일어날 결과가 내가 받게 될 보이다. 그러니까 업보는 인과의 다른 말인 것이다.

우리는 원인에는 결과가 있다는 사실은 수긍하지만 실생활에서 그 인과, 업보를 의식하고 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인과가 있음을 알게 되고 새로운 원인을 행함에 있어 선한 일만을 선택하고 노력하는 장한 사람일지라도 과거에 잘못한 일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업이다. 이미 내가 한 일, 과거에 내가 지었던 모든 원인 중에서 아직 받지 않은 결과, 보가 있는 것이다.



한 동자승이 울면서 스승님께 묻는다.

“스승님. 제가 전생에 지은 정업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스승은 말한다.

“받게 될 것이다”

잔인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부처도 정업은 피하지 못한다고 했다. 부처도 지어놓은 업은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정말로 방법이 없을까?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는 이렇게 말했다.

“부처가 되어라.”



부처도 정업은 피하지 못하지만 정답은 부처가 되는 수밖에 없다.

5살 꼬마가 30살 건장한 사내를 때리면 어떨까? 5살 꼬마가 아무리 주먹을 꼭 쥐고 때린다 하여도 30살 건장한 사내는 아프거나 다칠 일이 없다. 그저 꼬마의 주먹을 받으며 꼬마가 그만 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그 꼬마의 마음을 알아주고 꼬마에게 맛있는 간식이라도 사 주면 되는 일이다.

정업도 마찬가지다. 받아야 하는 일이면 받으면 된다. 단 내가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 큰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부처라는 큰 사람이 되어 있으면 돌아오는 과보는 곧 과보가 아닌 것이 된다.

부처가 되는 것은 원론적인 방법이다. 사실적인 방법도 있다. 선업을 쌓는 것이다. 내가 이미 지어놓은 악업과는 별개로 내가 선업을 쌓으면, 내가 악업의 결과를 받는 순간에 나를 도와주는 인연들이 나타나게 된다. 인연뿐만 아니라 선업의 결과가 그 악업의 결과를 상쇄해 주는 것이다.

선업의 방법은 많다. 어떤 선업이라도 좋다. 그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선업은 공익을 위한 선업이다. 내가 공익을 위해 기부를 하고 보시를 하면 그 돈과 물건이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쓰여진다. 그 많은 사람이 결국 나에게 갚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변의 많은 사람, 더 나아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도와주는 일이 생긴다.

원인이 있는데 결과가 없을 수는 없다. 내가 지금 행하는 모든 일이 원인이다. 선한 일을 하면 선한 과보를 받고 악한 일을 하면 악한 과보를 받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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