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분다. 화단이랄 것도 없는 베란다의 꽃, 나무에 봄바람이 분다. 눈길을 돌린다. 나뭇가지만 앙상했던 느티나무 분재엔 뾰족한 촉이 돋고 겨울 동안 방치했던 화초들도 물이 오른다. 겨우내 껴입었던 카디건을 훌훌 벗어던지듯 주섬주섬 주변 화분들을 정리하다 보니 얼마나 게을렀던지 여기저기 먼지투성이다. 좁은 틈 사이 뿌연 거미줄에 애처롭게 엉켜 있는 영산홍 낙엽들, 마치 담장에 버석버석하게 말라비틀어져 손끝만 대도 금방 바스러질 것처럼 널브러져 있는 누런 호박넝쿨처럼 처량해 보인다. 그런 와중에 옷 속을 후벼 파는 꽃샘바람이 아직도 차갑게 느껴지는 베란다에 봄볕이 구슬처럼 굴러들어와 봄을 재촉한다. 덩달아 내 마음도 봄 한가운데를 달리며 새롭게 단장될 화분들을 매만지는 손질로 분주하다.
베란다 모퉁이, 무관심이 가져다준 행복하나가 눈길을 잡는다. 애지중지하지 않았음에도 어느 틈에 붉은 꽃망울을 주렁주렁 달아 놓은 게발선인장이다. 그 옆에 접목선인장으로 더 알려진 비모란선인장도 매혹적인 자태로 한참 봄맞이 중이다.
꽃들의 불륜이 시작되는 요즘 바람마저도 설렌다.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더니 길조라 일컫는 선인장 꽃을 볼 마음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무심했으면서도 종속 번식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앞에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기만을 기다리는 무지렁이다. 선인장의 꽃이 곰살곰살 피기만을 고대했지 왜 꽃을 피우는지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꽃을 보려는 마음이 달뜨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선인장의 꽃말은 불타는 사랑이다. 갑옷처럼 두껍고 단단한 가시로 온몸을 무장하여 독보적인 아우라를 뿜어내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그뿐인가. 꽃을 피우는 시기가 길기도 하지만 어떤 종류는 생애 단 한 번만 꽃을 피운다. 또한, 밤에만 살짝 꽃을 피우는 선인장도 있다. 그래서 선인장 꽃을 본 사람을 밤손님이라 놀려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온 정열을 쏟아 피워 올린 아름다운 꽃, 선인장은 그 이면에 자신의 몸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종족 번식을 위해 강인한 생명력으로 꽃을 피우고, 또 자구(어린 선인장)를 단다. 원초적 본능으로 번식에 최후의 강인한 힘을 쏟는다. 그렇게 곱디고운 그 꽃은 그들의 치열한 삶이요 생명인 거다.
공기 정화를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무심하게 기른 관엽식물과 선인장은 분갈이조차 한 번도 해 주지 않았음에도 숙명인 듯, 운명인 듯 스스로 꽃을 피우며 삶을 이어간다. 귀하디 귀한 선인장 꽃, 아름다움 이면의 깊은 뜻을 헤아리질 못한 무지가 들통날까 난 조각난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느라 자꾸 몸이 움츠러든다. 애정도 주지 않았던 이기적인 나의 언밸런스 같은 속내가 부끄러우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길조라는 선인장 꽃을 오랫동안 보고픈 욕망이 또 앞서는 나. 새가 비상하듯 매혹적인 붉은 꽃망울을 활짝 터트릴 선인장 꽃에 연민과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이 엇박으로 시소를 탄다.
식물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과욕을 부리지 않으며 결실을 거두고자 일련의 과정에 충실한다. 인간은 무엇이든 욕심을 부려 소유하려고 하지만 자연은 모든 것을 다 내준다. 하여, 쫓기다시피 사는 우리들 자연을 닮은 아니 자연 그대로를 담은 마음이 넉넉한 삶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바람이 인다. 바람, 햇살 그리고 애증이 머물고 얄궂은 꽃샘바람이 훑고 지나간 아린(芽鱗)의 자리에 따스함이 내려앉는다. 꽃들의 불륜이 시작되는 봄이 오는 길목, 꿈틀꿈틀 봄바람을 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