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남한강에 깃든 문화유적 이야기
충주 남한강에 깃든 문화유적 이야기
  • 정춘택 충북도 문화재연구원 조사2팀장
  • 승인 2021.04.0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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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정춘택 충북도 문화재연구원 조사2팀장
정춘택 충북도 문화재연구원 조사2팀장

 

충주에서 유구하게 흐르는 남한강에는 이와 관련된 독특한 문화유적들이 있고, 또 특별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이 가운데 삼국시대 치열했던 각축지(角逐址)와 연관이 있는 유적, 고려시대 이후 조운제도(漕運制度)와 관련한 덕흥창(德興倉), 그리고 남한강변의 창동리 마애불에 대한 이야기를 차례로 살피면 충주 남한강에 깃든 문화유적의 흐름을 대강 이해할 수 있다.

삼국시대 충주 남한강 유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다. 백제는 현재 충주 칠금동에 해당하는 남한강변의 나지막한 구릉에 대규모의 제철 생산단지를 만들었다. 여기서 생산된 철은 남한강을 교통로로 하여 당시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慰禮城)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충주 남한강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는 고구려는 남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백제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결국,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을 점령한 이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 유명한 충주 고구려비가 세워지게 된다.

이렇게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백제와 신라는 크게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濟同盟)을 맺고 북벌을 감행하게 되며, 결국 고구려로부터 남한강 유역을 다시 빼앗게 된다. 이후 신라는 나제동맹을 깨고 남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은 남한강변에 있는 충주 탑평리 유적에서 살필 수 있는데, 이 유적에서는 백제와 고구려 유적을 파괴하고 그 위에 신라의 집터와 도로 등이 들어선 것이 발굴조사된 바 있다. 이처럼 삼국시대에 충주 남한강 유역은 패권의 향방을 가를 만큼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치열한 각축지이자 쟁패지(爭覇址)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충주 남한강은 가장 중요한 내륙 수운로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바로 충주에서 배를 띄우면 노를 젓지 않아도 만 하루면 서울에 닿았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걷은 세곡을 보관하기 위해 모두 13곳의 조창을 설치하게 되는데, 11곳의 조창이 서해안 바닷가에 설치된 것과 비교해 내륙 수운로에 설치된 조창은 충주의 덕흥창과 원주의 흥원창 두 곳뿐이었다고 한다. 특히 충주 남한강변인 창동리에 설치된 덕흥창은 고려시대 최대의 조세 수납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편 창동리에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6호인 창동리 마애불이 남한강과 바로 맞닿은 비스듬한 바위에 얕은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 창동리 마애불에 대해 조각의 수법이나 표현 등을 살펴보았을 때, 고려시대 지방색이 나타나는 마애불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창동리 마애불이 남한강과 달천강의 합수머리 쪽인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조세운반을 위해 남한강을 오가는 수많은 뱃사람은 이 합수머리를 지날 때 창동리 마애불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평지에서 보았을 때는 비스듬해 보이지만, 배를 타고 넘실거리는 강물 위에서 이 마애불을 바라보게 되면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한다. 아마도 이 마애불은 수운을 오가는 뱃사람들의 안전과 안녕을 기원하는 신앙적 대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한반도 중앙에 있는 충주. 그리고 그곳에 유구하게 흐르는 남한강 유역은 삼국시대에 가장 치열한 각축지이자 쟁패지가 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남아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충주 남한강은 고려시대에 중요 조운로로서 그 역할을 크게 하였다. 특히 고려시대 13조창 중 가장 큰 규모의 덕흥창이 이곳에 있었고, 또 이곳을 오가던 뱃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창동리 마애불 등이 있었다는 점은 다시금 충주 남한강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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