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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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1.04.0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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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 물고/ 땅으로 뛰어 내리기 전에 (송찬호, <동백이 활짝,> 전문) 송찬호 시인의 '동백이 활짝`을 읽으면 사자처럼 용감한 동백이 느껴진다. 화르르 툭 떨어지는 동백의 자결 같기도 하고. 강렬한 붉은 꽃잎은 만물이 아직 겨울을 알리고 있음에도 저 홀로 깨어 꿋꿋이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려 자신의 강인함을 온몸으로 말한다. 각설하고, 당신은 아시는가, 동백꽃이 제주 4·3항쟁의 상징꽃 이라는 것을. 강요배 화백의 4·3연작 시리즈 “동백꽃 지다_제주민주항쟁전”의 표지화와 작품으로 등장하면서 부터다.

4월엔 아픈 날이 많다. 지금도 진행 중인 아픔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 4·3제주민주항쟁을 그린 그림책 <무명천 할머니>를 이야기하고 싶어 이렇게 들어가는 말이 길었다. 특히 요즘 미얀마를 보며 만감이 교차하고 살이 떨린다. 우리의 80년과 오버랩이 되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 광주 5·18 기념에 맞춰 그날의 사진들을 전시하는 작업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서 토한 기억이 있다. 한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인간자체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돼서다. 공산당으로 물든 제주도를 민주화 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도에서 그쳤다. 이웃으로서 부끄럽다.

기억이 없는 곳에는 역사도 없다. 역사가 없는 곳에는 인간의 존재도 없다. 김석범 소설가는 반세기가 넘도록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으며 이것은 `기억의 자살'이라고 말했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 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이라고까지 말한다.

<무명천 할머니>그림책은 4·3제주민주항쟁을 기억의 자살에서 스스로 구원하는 작업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현대사의 비극이자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상처로 남아 있는 사건이 그림책으로 나와 주어 감사하다. 제주 4·3중에 북제주군 한경면 판포리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하여 쏜 총에 턱을 맞고 쓰러진 여성 이야기다.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는 총탄에 너덜너덜해진 턱을 가위로 잘라내고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약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았다. 자신의 턱과 얼굴의 반을 가리고 흘리는 침을 무명천으로 덮고 살아갔다고 한다. 상상해보시라. 턱 없이 어떻게 말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병처럼 문 잠그는 것에 집착했던 그녀는 고통만 받다가 돌아가셨다. 살아가는 동안 가족과 친구, 친척이 아무 죄 없이 끔찍하게 몰살당함에도 오히려 빨갱이로 몰릴까 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서 온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작금의 모든 정치, 사회적 불쾌한 일들의 원인도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남은 자 우리의 역할은 자명하다. 사실을 명확히 알리고 제대로 된 수습이 필요하다. 역설적으로 4·3제주민주항쟁은 인간 생명의 고귀함과 인권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었다. 이웃으로서 우리는 진 빚을 갚아야 할 때이다. 해마다 동백꽃을 죄책감 없이 보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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