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국민·답답한 지도층
뛰어난 국민·답답한 지도층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1.03.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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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평가받는 나라는? 지능지수, 초등학교 학생 학업수준, 노벨상 수상 실적을 기준으로 평가한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 10위였다. 흥미로운 건 지능지수와 초등학교 학생 학업수준만을 따지면 세계 1위에 해당한다. 노벨상 수상 실적이 없어서 10위로 밀려났다고 한다. 국민들의 기본 머리는 세계 최고지만 성과물 산출이 잘 안 된다.

일전에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가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인 분야를 꼽아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영화, 싸이나 방탄소년단 같은 가요, 여자골프, 양궁, 쇼트 트랙, 인터넷, e스포츠, 반도체, 보건의료, 문자 해독률, 대학진학률 등에서 세계 최상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이공계, 예체능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친구들의 분석에 따르면 열심히 하면 결과가 그대로 반영되는 분야에서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기득권층, 사회 지도층의 여과를 거치는 분야의 경쟁력은 형편없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우수 인재가 사회시스템을 거치면 보통의 평범한 인간은 돼도 특출나게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인재가 되기는 어려운 구조로 짜여 있다고 한다.

어차피 모든 사회는 피라밋 구조로 짜여 있어서 상층부로 진입하려면 필터링을 거쳐야 한다. 이런 필터링 장치가 수학이나 과학처럼 공식화되어 있는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이런 필터링 장치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은 예체능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정도 정착된 사회시스템을 거치게 되면 뛰어난 인재가 평범한 사람이 된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전 세계에서 학업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한다. 우리 학생들은 세계에서 최고로 불행하다. 사회 시스템을 통과할 때 불행하기까지 하니 참 심각하다.

인재선발의 권한을 가진 사회지도층의 마음에 드는 인재는 모난 돌이 아니다. 모가 나면 정을 맞기 때문에 중뿔나게 나대면 안 된다. 심지어는 임금도 특출나게 나서면 안 되는 것이 우리나라 사회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선비 최만리가 나선다.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 이질적인 소리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 부끄러운 일이니 훈민정음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반대한다. 더 나아가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 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물어야 하는데 그런 절차 없이 졸속하게 추진하면 안 된다고도 한다.

그건 옛날이라고?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대학 국어학 교수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이 사람은 국립국어원장, 수능출제위원장까지 역임한 바 있는 국어학분야 최고 전문가이다. 최만리가 훈민정음이 이두보다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해서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지게 만든다고 한 것처럼 이 교수는 한자는 고급문화와 지식이기 때문에 저속한 한글보다 우수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한자를 국자(國字)로 인정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한글은 사용한지가 570여 년 밖에 안됐지만 한자는 2천년 동안 사용해왔기 때문에 훨씬 우수하다고도 한다. 일본은 일본 문자와 한자를 혼용하기 때문에 우리 민족보다 머리가 우수하다고까지 말한다. 짚신주제에 보다 우수한 문화를 배척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사람이 국립국어원장도 하고 가장 우수한 인재가 다닌다고 하는 대학에서 우리말을 가르치고 후학들을 양성했다고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나라 유수의 보수 일간지는 대놓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직 국무총리, 전직 헌법재판관, 전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 300여 명이 대놓고 한자를 국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외래문화를 섬기면서 자국의 우수 문화유산을 폄하하는 사회지도층의 시각에서 아래 사람을 골라 쓰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스스로를 고급문화권의 변방에 사는 저열한 사람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도층인 사회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가 나올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충북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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