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봄
먼 봄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3.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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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주말 내내 비가 내렸다. `명자'가 망울을 틔어 환히 웃고, 가지에 영롱한 망울을 달아 한껏 치장을 한다. 꽃망울을 위로, 빗방울을 아래로 달았다. 위아래로 달아 추단하기 어려웠던지 비가 멈춘 사이 수면위에 한 두 방울 떨군다. 허전한지 떨군 가지에 또 망울을 단다. 그렇게 달고 떨구고를 반복하며, 수면에 동그란 원을 반복해서 그린다.

비가 내리는 주말과 주일 내내 추웠다. 추적추적 내리다 부슬부슬 내리다 갑자기 후드득 소리를 내며 연신 내린 비는, 몸서리 치듯 한기를 더했다. 동이 트기만 하면 주섬주섬 걸치듯 옷을 입고 나가는데 오늘은 유독 주저한다.

주저함도 잠시, 춥다고 비가 온다고 움츠릴 내가 아니지 않은가? 천성이 그러하거니와 작물을 기른다는 것은 때를 놓치면 안 되는 일이다. 비를 핑계 삼아 시간을 놓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일 년을 멋지게 만든다는 주문과 동시에 돌진이다.

얼마 전 모종판에 파종한 완두콩이 하트모양의 두 잎 사이로 한 줄기 여린 넝쿨손을 내밀었다. `완두'는 추위에 강한 내성이 있다. 더워지기 전에 정식해야겠기에 비가 주춤한 틈을 타 지지대를 만들 나무를 고른다. 가녀린 넝쿨손이 오를 지지대 몇 개를 골랐다. 일정한 길이를 맞춰 톱으로 자르고, 잘 갈아 두었던 자귀로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완두' 옆에 단단히 박는다. 그리고 지지대로 오르기까지 비닐이 덮인 가느다란 철사를 가로로 질러준다. `완두'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품는 기쁨의 기억을 실현시키는 마중줄이다.

그런 사이 비는 옷을 적셨다. 소스라치듯 한기도 덤으로 주었다. 그러나 움츠린 시간은 한순간, 젖은 장갑을 갈아 끼고 다음 주에 `대파' 모종을 이식할 두둑을 만든다. 먼저 잘 숙성된 퇴비를 밑거름으로 하고 부슬부슬한 흙을 뒤집어 두둑을 높게 만든다. 고랑은 파서 배수가 잘 되게 만든다. 습하면 뿌리가 무르고 썩기 때문이다. 두텁고 푹신하고 보슬보슬하게 만들어진 곳에 자리하고 뿌리를 내려 대를 키울 것이다. 그리고 주먹만 한 커다란 씨를 단 공이를 만들 것이다. `파'는 잘 만들어진 터에서 주어진 일을 마칠 것이다.

오후는 여기저기 발아해 자라는 녀석들을 정리한다. 심지도 않았는데 한자리 하는 녀석들이다. `인동'바로 옆에서 발아된 `화살', `대봉'아래 `수국'이 `옮겨심기'할 녀석들이다. `화살'은 봄에는 홑잎나물로, 가을에는 뜨거웠던 불의 기억을 상기시키듯 단풍을 선사하니 볕이 잘 드는 자리로 옮긴다. `수국'은 물을 좋아하고 그늘이 적당히 생기고 노지월동은 되나 삭풍을 막아줄 위치를 선정하여 이식한다. 각각의 위치는 녀석들의 습성을 최대한 고려해 옮긴다. 보기 좋게만 배치해서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위치를 정하다 보면 뜰 전체가 망가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옮기지 않는다. 자리 잡고 세력을 뻗어가는 방향으로 자란 커다란 잡초만 제거한다. 녀석들의 성장에 걸림돌만 제거하면 디딤돌을 알아서 놓는다. 한 뼘의 면적에도 수많은 뿌리가 교차하고 있다. 그렇다고 절대 엉키거나 단절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옮긴다는 것은 제 흙을 유지하고 잔뿌리가 다치지 않게 분을 뜨는 작업이 더 어렵다. 서로 관계성을 단절시키면서까지 옮긴다는 것은 충분한 탐색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작지만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새로운 공동체가 되는 뜰에서 일어나는 일에 난 하나의 부분이고 조력자이다. 때가 되었다고 저절로 자라는 작물은 없다. 습성을 무시하고 잘 자라는 작물은 없다. 씨가 발아되며 꿈꾼 것을 실현하는 곳이 뜰이기에, 씨 하나에, 잎 하나에, 뿌리 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여우볕이 저녁나절 들었지만, 종일 내린 비에 며칠 전 만개한 매화와 앵두가 덩달아 꽃비가 되었다. 꽃은 만개했는데 봄이 아슬히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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