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春), 새벽별을 봄
봄(春), 새벽별을 봄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2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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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봄날 새벽별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춘분이 지나면서 해는 더 일찍 뜨고 밤은 짧아지면서 여명은 더 빨리 세상을 찾아옵니다.

새벽 산책길, 사방이 밝아지는 시간이 점점 더 빨라지는 것으로 실감하는 봄은, 연둣빛으로 바뀌는 풀잎이거나 나뭇잎의 싱그러운 변화에서 비롯되는 느낌과는 또 다른 봄입니다, 안간힘으로 노랗고 하얗게, 또는 연분홍으로 채색하는 꽃들로부터 얻는 감흥은 돌이킬 수 없는 봄의 시작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감의 의미가 있습니다. 어둠은 소리 없이 물러나고 어렴풋이 사물의 윤곽이 드러나는 시간. 꽃들이 문을 여는 경로는 더디지 않고, 꽃눈에서 꽃망울로, 그리고 하나씩 꽃잎을 열며 마침내 우주를 열어가는 꽃들의 차례는 경이롭습니다.

마침내 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길에서 별을 봅니다.

잠깐 잠깐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는 새벽길의 습관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적은 드물고 세상은 적막한데, 혼자 걷는 길에 벗이 되어주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가벼운 움직임과 호흡을 느끼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과 달을 처음 보던 날. 그날따라 별이 있고 달이 있어 외롭지 않다는 위로를 받았던 기억 이후로 생긴 습관인 듯합니다.

그 후로 나는 새벽길을 걸을 때마다 하늘의 별과 달을 꼭 찾아봅니다. 잠깐씩이라도 보아주지 않으면 괜스레 미안해지기도 하고, 별과 달이 존재함에 따라 내 존재도 확인할 수 있다는 위안이기도 합니다.

새벽별을 보는 일은 홀로 깨어 있어도 외롭지 않다는 것, 그리고 몸은 비록 다다를 수 없을지라도 이상은 항상 높은 곳을 향하는 희망이기고 하고, 또 이루지 못한 일을 동경하며 스스로를 다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길보다 조금 낮은 물가를 거닐거나 오르막길을 지나 산길을 헤매는 새벽.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며, 그 검은 하늘에 서로 홀로 떨어져 있는 별과 달을 보며 우뚝하고 높은 정신을 다짐하는 기도와도 같은 일. 봄날 나는 새벽길을 걸으며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총총히 빛나는 별을 찾아 그중에 별 하나를 꼭 찍어 내 심장에 담아 놓고 있습니다.

봄이 되면 새벽별을 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해가 길어지는 계절의 변화가 새벽별의 빛을 일찍 거두어가는 첫 번째 이유겠지요. 봄밤의 하늘은, 쨍하게 맨살을 드러내는 겨울과는 사뭇 달라서 밤에도 아련합니다. 겨울 밤하늘은 모든 생명을 움츠리게 하는 대신 유난히 초롱초롱한 별들을 통해 봄이 되면 우리가 가야 할 성찰의 길을 미리 빛나게 하는 것으로 나는 믿고 있습니다.

봄밤의 하늘은 온화한 대신 그리 투명하지 않습니다. 새벽이면 얼었던 몸을 푸는 강물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그 어렴풋한 공기는 그나마 잠깐 반짝이던 별빛을 감추면서 지상과 하늘의 경계를 흐릿하게 합니다.

겨울은 맑은 하늘과 투명하게 잔뜩 몸을 사린 대지 사이의 뚜렷한 공간을 만들면서 지상과 만물이 서로 구분되는 멀어진 관계를 만듭니다. 그러다 마침내 봄이 되면 깊은 땅속에 머물던 물기들이 완강하던 지표면을 뚫고 공중으로 번지면서 하늘과 멀어졌던 공간을 아지랑이이거나 숙연한 물안개로 채우곤 합니다. 그렇게 채워지는 `사이'에서 멀리 숨어 있는 별빛을 찾는 일은 봄에 꼭 해야 할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봄날의 새벽길을 길게 걸으며, 먼동이 트기까지 헤쳐 왔던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을 이제 봄빛에 맡기고 있습니다. 그 어스름한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서, 그리고 별빛을 숨긴 아득한 봄날의 새벽 안개를 통해 다만 부족하고 알뜰한 내 뜻이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생명의 호흡과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서두르는 봄날에는 일찍 몸을 숨긴 별빛을 찾아 고개를 한껏 젖히며 더 많이 하늘을 우러를 일입니다.

봄날의 새벽별이 지면 꽃이 더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박준. 지금은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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