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박한 정리’ 율량동에 뜨다
‘신박한 정리’ 율량동에 뜨다
  • 차지혜 청주시 율량사천동 행정복지센터 주무관
  • 승인 2021.03.2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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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차지혜 주시 율량사천동 행정복지센터 주무관
차지혜 청주시 율량사천동 행정복지센터 주무관

 

내가 근무하는 율량사천동은 인구 5만 명에 가까운 큰 동이다. 덕분에 복지 상담을 하다 보면 인구 수만큼이나 다양한 문제를 지닌 가정을 만나며 경제곤란, 가족해체 등의 위기 상황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문제별 해결책보다도 민원인의 자립 의지를 북돋워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여기 홀로 손녀들을 양육 중인 할머니가 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할머니의 부담은 커져만 간다. 기초생활수급 등 복지 혜택을 받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렵다. 큰 책임감은 마음의 병으로 커져 할머니는 우울증과 손 떨림으로 다니던 일마저 그만두게 됐다.
일시적 후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할머니의 가정을 방문했다. 오래된 아파트는 할머니의 부담만큼 많은 짐으로 가득해 정작 생활할 공간이 부족했다.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물 흘리는 할머니를 보며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답답한 현실의 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계한 것이 사회적 기업 휴먼케어의 `신박한 정리'였다. 동명의 TV 프로그램과 같이 취약계층 가구의 정리를 돕고, 정리 방법을 알려주는 복지 서비스이다. 갑자기 무슨 정리냐며 어리둥절해하는 할머니를 설득하고, 해당 사업에 의뢰했다. 바로 사전 답사가 이뤄졌고, 코로나19 대비 방역 대책까지 일사천리로 준비됐다.
대망의 정리 날이 됐다. TV에서 연예인이 정리된 집을 구경하기 직전 설??던 것처럼 나 역시 아침부터 가슴을 두근거리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연락이 와서 대상자의 집으로 달려간 순간, TV 속 주인공처럼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각 방에 가득하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물건들과, 정리할 여유가 없어 집안을 가득 채우던 박스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안락한 거실과 꼭 필요한 물건만 남은 방, 넓은 베란다까지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각 공간이 제 기능을 찾아 거실은 더 이상 할머니와 막내의 수면 공간이 아닌 가족 모두의 휴식공간이 됐고, 막내는 좌식책상이 아닌 제대로 된 책상에서 바른 자세로 공부하게 됐다.
변화는 집뿐만이 아니었다. 가정방문 때마다 늘 방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가 웃으며 내 방문을 반기게 됐다. 각자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거실 할머니 곁에 모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할머니에게 작은 일이라도 시작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다. 이전에 무기력하게 눈물만 흘리던 모습과 비교해볼 때 정말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이 가정은 아이들이 커갈수록 갖가지 문제가 생길 것이고, 할머니는 그때마다 부담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신박한 정리'의 경험은 자신의 문제를 주변에 알릴 때 함께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부디 이 기억이 앞으로 할머니와 손녀들이 살아갈 날들에 힘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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