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의 마지막 마라톤
이봉주의 마지막 마라톤
  • 이재경 기자
  • 승인 2021.03.2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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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천안주재(국장)
이재경 천안주재(국장)

 

1996년 12월 1일. 일본에서 열린 후쿠오카 국제마라톤 대회.

전 세계 매스컴이 세기의 대결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직전 8월에 열린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의 1, 2위 시상대에 올랐던 남아공화국의 투과니와 대한민국 이봉주와의 리턴매치가 열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미 4개월 전 애틀랜타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불과 3초 차이의 명승부전을 벌이며 대회 피날레를 장식한 인물들. 주최 측이 흥분할 수밖에 없는 진검 승부였다.

둘의 승부는 생각보다 일찌감치 결판이 났다. 투과니가 28km 지점에서 일찌감치 기권한 반면, 이봉주는 우승을 차지하면서 4개월 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세계 최강자의 자리를 다시 지키게 됐다.

이때 투과니의 기권은 영하의 날씨로 신체 리듬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때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스포츠계는 마라톤이 전천후 운동임을 고려할 때 더운 여름과 겨울에 잇따라 출전해 올림픽 은메달과 국제대회 금메달을 연거푸 따낸 이봉주를 그해 세계 최고의 철각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봉주의 은메달은 그 값어치 면에서 전혀 금메달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불굴의 노력과 땀의 결실로 만들어 낸 성적이 단지 메달의 색깔로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결승선 앞에서 3위까지 밀려났던 그가 혼신을 다해 역주하면서 2위로 올라선 모습도 온 국민에게 감격으로 다가왔다.

불굴, 투지, 땀. 이봉주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단어들이다. 그는 배가 고파서 마라톤 선수가 됐다. 팬티 1장과 운동화만 할 수 있었던 운동.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마라톤이었고, 짝발과 짝눈이란 신체적 불리함을 딛고 앞만 보며 내달렸다. 2001년엔 세계 3대 마라톤대회인 보스톤마라톤에서 한국에 51년 만에 우승을 안겨줬다. 1998년과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는 마라톤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의 선수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감독과의 갈등, 소속사의 부당한 처우 등으로 `무소속'으로 국제대회에 나서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잦은 발바닥 부상도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다. 와신상담 끝에 2007년 동아일보 국제 마라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듬해 운동선수 나이로 `환갑'인 40세에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41회째의 풀코스 완주였다. 그가 한국 최고 철각이란 증거다.

이런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1년 전쯤부터 `근육 긴장 이상증'이란 난치병을 앓고 있다. 복부 근육에 이상이 생겨 허리가 구부러지고 몸을 제대로 펼 수 없는 증세로 1년여 간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이렇다 할 수입원도 없이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해 의료비 부담으로 생활고를 겪는 그의 사연이 지난주에 TV를 통해 알려졌다.

박상돈 천안시장이 22일 이봉주를 만났다. 불편한 몸으로 고향 집(천안시 성거읍)에 사는 어머니를 뵈러 내려온 이봉주 전 선수를 박 시장과 한남교 천안시체육회장이 위문차 방문해 후원 의사를 내비쳤다.

이 소식이 SNS를 통해 알려지자 온라인에서 벌써 이봉주 돕기 캠페인에 참여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IMF 외환 위기를 전후해 천안시민은 물론 온 국민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앞만 보며 달려왔던 우리들의 영웅. 그 이봉주가 지금 막, 가장 힘든 자신과의 마지막 싸움이 될 `1인 출전, 인생 마라톤'에 도전하고 있다.

완주만 하면 금메달을 따는 경기. 우리 모두가 응원하면 우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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