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길
순례자의 길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1.03.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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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순례자들이 오체투지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차마고도인 티베트 라싸까지 2,100㎞를 머리와 두 손, 두 발을 땅에 붙여 바닥에 몸을 던지며 간다. 하루에 겨우 6㎞를 갈 뿐이어서 7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이다. 히말라야 4천 미터가 넘는 산소마저도 희박한 거칠고 험한 길이다. 그냥 걸어가기에도 힘든 길을 오체투지를 하는 그들을 보는 내내 시큰하여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오체투지는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절을 하는 것이다. 절을 하기 전 세 번의 손뼉을 친다. 이는 자신의 몸과 마음, 말을 뜻한다. 세 가지를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티벳 불교의 수행법이다. 눈비가 내리는 극한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파른 산을 오르고 계곡을 건넌다. 험하다고 해서 절대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그들의 이마엔 땅에 부딪혀 생긴 상처가 아물기를 반복하여 피멍이 들었고 무릎에는 물집이 생겼다가 아물어 굳은살로 변했다. 나무장갑을 낀 손바닥에도 전체가 굳은살이 박였다. 힘이 들면 들수록, 고통이 심해질수록 자신의 죄가 더 많이 씻긴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고행을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다큐를 보는 내내 왜 힘든 고행을 자처하는지 시작부터 묻고 싶었다. 인내의 여정동안 그들은 이 세상 모든 중생의 평안을 기원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때 진정한 선을 행하는 것이며 윤회의 업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오랫동안 알려진 순례의 길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상처를 잊기 위해,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또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 찾는다. 나처럼 그저 걷는 것이 좋아 찾는다는 여행객도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 떨어진 서쪽 땅끝마을 피니스테레는 도보 여행자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다. 대서양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바위 언덕 위에 올려져 있는 순례자의 신발로 유명하다.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숫자가 0으로 된 표지판으로도 자자하다. 순례지의 끝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전에는 그동안 신고 왔던 신발을 태워버렸다. 과거의 나와 작별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겠다는 장엄한 의식이라고 한다. 지금은 불을 피우지 못하기에 신발 모양을 한 조형물이 그들의 아쉬움을 대신하고 있다.

삼십 년을 한우물을 판 아들에게 가끔 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공부하기가 좋으냐고. 차마 겁이 나 물어보지 못했다. 행여 싫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이제서 어쩌나 해서였다. 너무 많이 와 버려서 그만둘 수도 없는 길이기에 말이다. 공부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나의 눈에는 아들이 순례자다. 엄청 많은 시간을 자신과 외로이 싸웠을 길. 때로는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 채어 넘어지기도 했을 길. 묵묵히 걷는 그 길이 순례 길처럼 고고하게 느껴진다.

이제 끝이 보이는 긴 노정(程)을 박수로 위로한다. 아들은 0인 표지판을 앞에 두고 있다. 끝을 맺어야 하는 올해가 고비다. 하나도 해줄 게 없는 어미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운전을 하면서도, 자다가도 불쑥, 일하는 틈틈이 불거져 나오는 건 오로지 기도뿐이다.

아들의 힘든 길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동안 연금술사 책 속의 한마디가 절실하다. 살렘의 왕 멜키세덱이 방황하는 산티아고에게 속삭인 그 말.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이 말은 내게 최고의 위안이다. 나의 절절한 기도를 아들의 순례 길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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