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내 사랑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1.03.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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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만질 수 없다. 향기도 없다. 아무 곳에나 있지만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구원이 되고 때로는 영혼을 옥죄는 감옥이 되기도 하는 것.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덮쳤다가 사라지는 지독한 열병이지만 가난한 사람도 부자인 사람도 불안한 앞날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깨어 있는 현실이 꿈속보다 더 몽환적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거나 듣게 되면 차가운 머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가슴만 뛴다. 맹목적인 사랑은 상대방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한마디로 사랑에 빠져 있으니 이성이나 지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기에 네가 곁에 있을 때조차 보고 싶다는 헛소리도 하게 된다. 하물며 만날 때마다 당연하게 내 사랑이라고 불러준다면 어떻겠는가, 그 달콤함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걸 부정하지 못한다.

봄의 문턱을 넘어섰지만 아직은 옷깃을 여미게 하는 주말 오전이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차 소리에 이어 콩콩거리며 계단을 뛰어오르는 발자국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현관문을 소리 나게 열고 신발 벗을 사이 없이 들어서서 와락 껴안는다. 게다가 촉촉한 목소리와 솜사탕 같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내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해가 아니고 내 사랑이란다. 온전히 제 것이라니, 수많은 단어 가운데 이 말보다 더 사로잡는 말이 있을까. 연인에게서 듣는다면 수많은 생각이 교차할 터이다. 진실이라고 믿어도 돌아서면 언제까지 사랑해 줄까, 믿어도 될까, 사랑한다고 해놓고 마음 변하면 어쩌나, 걱정과 근심이 끊이지 않겠지만 아이에게 듣는 말은 순수하고 깨끗하고 계산적이지 않아 더욱 감동적이다.

오랫동안 나는 사랑은 머무는 것이라 생각했다. 머무는 사랑과 사랑 사이에 욕망이 덧칠해지면서 상처와 슬픔이 쌓여가는 것이라 여겼다. 누군가를 왜 사랑하는지 답하는 것은 물이 어떤 맛인가 설명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사랑을 전해 줄 대상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영혼은 아름다워지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기에 집착하지 않고 무게를 싣지 않으려 노력한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게 아쉬움을 주는 관계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가끔은 주는 것만큼 돌려받지 못해 연연해 할 때도 있으나 사랑의 느낌으로 행동하는 것을 때때로 억제하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다.

아이는 할머니라는 명칭보다 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놀이를 바꿀 때마다 더욱 잦아진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내가 그 모양이 되어 사랑의 방식도 무너졌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몇 시간씩 같이 놀아주고 나면 몹시 피곤한데도 번번이 `내 사랑'에 빠져든다. 아이도 자라면 마음 변한 연인처럼 제 길을 향해 떠날 것인데도 지금은 `내 사랑'을 위하여 샴페인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친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너무도 많다. 빈 가지에 무심코 깃드는 햇살 한 줌, 찬바람 속에 세상구경을 나온 애기 새싹들, 환한 미소로 다가와 `사랑해'하거나 `내 사랑'이라고 명지바람처럼 부드럽게 속삭이는 달콤한 목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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