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타령
내 집 타령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21.03.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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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새들이 알을 낳거나 깃들이는 곳을 둥지라 하기도 하고 보금자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미물인 새들도 저마다의 둥지와 보금자리가 있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이야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래요. 사람들도 둥지나 보금자리라 불리는 자신들의 집에서 살지요. 그게 자가든 임차든, 단독주택이든 연립주택이든 아파트이든.

그렇듯 집은 가정이라는 생활공동체가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1인 가구가 늘어가는 추세이긴 하나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사랑이 있는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을 꿈꾸며 삽니다.

하지만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극자본주의의 폐해로 인해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새들이 깃드는 둥지는 고만고만한데 사람들이 사는 집은 천차만별이고 천태만상이기 때문입니다.

금수저들은 태어날 때부터 대궐 같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데 흑수저들은 평생을 피땀 흘려 일해도 흔한 아파트 한 채 장만키 어려운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사람은 성인이 되면 부모슬하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는데 독립에 필수적인 게 바로 숙식을 할 수 있는 집입니다.

부모 잘 만난 행운아들은 자가에서 출발하지만 대다수는 월세 또는 전셋집에서 내 집 마련의 부푼 꿈을 안고 도전과 응전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런 선남선녀들이 집 장만을 위해 수십 년을 악착같이 돈을 벌고 모았는데도 전셋집을 전전한다면 비극입니다.

더욱이 정부가 부동산정책을 잘못 써서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켰다면 그리하여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이 요원해졌다면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아니 그들 앞에 석고대죄해야 합니다.

국민들의 원성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LH직원들의 개발지역 땅 투기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소유가 평등해지고 공정해지려면 집과 아파트를 돈벌이의 대상이 아닌 하늘을 나는 새들의 둥지나 보금자리처럼 기능하게 해야 합니다.

사는 이들의 행복충전소로 거듭나게 말입니다.

문득 필자의 30년 전 내 집 마련 때의 벅찬 감동이 뇌리를 스칩니다.

그로부터 10년 전에 전셋돈 250만원을 내고 13평 주공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부부가 맞벌이공무원을 해도 해마다 오르는 전셋돈을 감당하지 못해 2년마다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했고. 이사할 때마다 번거롭고 힘도 들었지만 돌아가신 아버님이 제삿날 수시로 바뀌는 아들 집을 힘들게 찾아오실 것 같아 죄송스럽고 가슴 아파 속울음을 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살던 전세금과 은행대출금을 보태 신축한 24평 서민아파트를 1,050만원에 구입해 난생처음 등기부에 이름 석 자를 올려서 뿌듯하기도 했지만 제사 때마다 죄송했던 아버님이 생각나 기쁨과 회한이 교차되는 먹먹함에 울컥하기도 했었거든요.

이렇듯 내 집이 있다는 건 축복이고 내 집을 내 손으로 장만했다는 건 감격입니다.

제가 그랬듯이 사람들은 살던 정든 집도 세월이 가고 여건이 되면 팔고 새집으로 이사를 합니다. 타던 차를 팔고 더 좋은 차로 갈아타듯이.

살던 집을 팔고 취향에 맞는 집을 짓거나 사서 옮기는 건 헌법이 보장한 거주이전의 자유입니다.

문제는 한 사람이 돈벌이를 위해 여러 채를 소유하거나 주거가 아닌 투기목적으로 집을 사고파는 행위입니다. 공정과 평등을 저해하므로 단죄해야 합니다.

아무튼 집 없는 설움과 집 없는 불편은 없는 자만이 압니다.

월세 살아도 차는 좋은 차를 타야 한다는 신세대들도 많지만 집 없는 사람들의 삶의 1의적 목표는 단연 내 집 마련입니다.

그러나 집이 있다고, 집이 대궐처럼 크고 좋다고 반드시 행복한 건 아닙니다.

사랑이 없고 감사가 없고 즐거움이 없는 집은 구조물일 뿐입니다.

꿈과 웃음과 쉼표가 있는 아늑한 집의 주인이 그대이기를.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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