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인간의 역사
토지, 인간의 역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1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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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내가 박경리의 위대한 소설 <토지>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본 날이었다.

질풍노도의 파란에 일찌감치 휩싸여 있던 어린 나는, 정답을 맞춰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담장 너머로 시험 문제지를 던져 버리고 <청주극장> 잠입에 성공했다. 김지미와 허장강 등 당대 톱스타들이 등장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훗날 소설로 읽은 <토지>는 가히 압권이었다.

펄 벅의 소설 <대지> 역시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영화 <토지>보다 훨씬 전 TV `주말의 명화'를 통해 본 것 같은데, 흑백영화였고 중국 이야기인데 주인공들이 죄다 중국옷을 입은 백인이라는 점이 이상했던 기억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다만 세상을 온통 뒤덮는 엄청난 메뚜기 떼의 습격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으니, 위대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이때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 LH사태에 대해 두 번째 글을 쓴다. 아니 그동안 나는 나라의 토지와 집값에 대해 <수요단상>을 통해 여러 차례 나름의 격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소설가 박경리의 역작 <토지>를 LH사태에 연상시키는 무례를 저지르는 까닭은 `토지'라는 것, 그 `땅'이라는 것이 삶의 근원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진리임을 새삼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토지>라고 정한 것은 대지도 아니고 땅도 아닌 것, 즉 땅이라고 하면 순수하게 흙냄새를 연상하게 되고 대지(大地)라고 하면 그냥 광활하다는 느낌만 들어 그 밖의 것을 찾다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제 느낌입니다만 토지라고 하면 반드시 땅문서를 연상하게 되고 `소유'의 관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역사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리 역시 대하소설 <토지>에 대해 잡지 `신동아'와의 대담을 통해 `소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간단하지 않고 치열한 삶의 본질과 맞닿아 있어야 하는 것이 `토지'의 본질임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다만 `토지'가 예나 지금이나 `소유'를 전제로 하는 인간 `욕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으나, 개개인의 욕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존엄성 내지 공동체적 역사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소설<토지>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욕망을 탓하지는 않으나 그 욕망이 `나'는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움직여나가는 것인가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욕망으로 향하는 움직임에 부끄러움은 얼마나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감시와 통제는 반드시 필요할 것인데, 과연 그동안 나라의 부동산 정책과 그 정책의 수행 과정에 도둑질은 얼마나 있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도둑질에 대한 유혹이 있었겠는가.

박경리의 <토지>를 집중 연구해 온 김연숙 교수는 <나, 참 쓸모있는 인간>이라는 책을 통해 이 소설의 힘이 “가장 무력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찾아나간 사람들”에 있다고 했다. 덧붙이면 나는 그 모진 정치와 사회, 신분과 계급의 극렬한 대립 한 가운데 도도히 흐르는 공동체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대통령은 `촛불의 정신으로 부동산 적폐 척결'을 말하고 있고, 언론은 `보유세 쇼크'로 겁박하면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담벼락 위에서 물러설 곳 없다는 식으로 겨루고 있다.

문제는 `부동산 적폐'이거나 `보유세 쇼크'라는 흔한 술어가 우리 같은 서민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화뇌동에 홀려 가난한 사람에게도 세금폭탄이 떨어질 것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우리가 원하는 집은 고된 일상을 마치고 그저 편하게 쉴 곳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좀 나눠줄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대신 주거가 공공의 틀에서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자연환경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도록 그린벨트는 엄숙하게 지켜주고, 자꾸만 새집을 짓고 더 좋은 집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는 대신 남아도는 집을 서로 나누어 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쪼끔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제 수도권을 그만 부풀리고 지방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줬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얼룩진 신도시 계획을 당장 멈추고, 공급과 개발 중심의 정책도 멈추는 결단이 시급하다. 그 결단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스며들어 있는지를 `역사적으로'돌아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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