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삼월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1.03.0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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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삼월 첫날, 산기슭 음지에는 잔설이 남았는데 집안으로 봄이 성큼 찾아왔다. 작년 초겨울 추위를 피해 마당에 있던 화분을 실내 계단 옆으로 옮겨 놓았다. 사용하지 않는 계단이라 화분에 물 주는 것도 잊을 때가 많았다. 국기 함을 찾으려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 연분홍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 있다. 통풍은커녕 작은 창으로 근근이 볕을 보며 추위에 맞서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워낸 것이다.

102번째 맞이하는 3·1절이다. 나라를 위해 수천만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 날. 만세운동은 하루에 끝나지 않았고 1919년에만 1700여 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을 이루기까지는 일본의 총 칼에 맞선 저항이 그 천 배도 넘었으리라.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전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내놓고, 자신의 목숨도 초개처럼 버렸으니 가장을 잃은 가족들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요즘 SNS를 뜨겁게 달군 글에 머리가 쭈뼛했다. 호화스러운 저택과 지붕 낮고 초라한 집 사진 두 장을 비교하며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을 비하한 글이다. 친일파 후손은 열심히 살아서 부유한데, 독립 운동가는 도대체 무엇을 했나, 라는 조롱 섞인 글이 한 웹툰 작가에 의해 개재되면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부모 세대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우리의 역사를 친일로 물들이는 글을 읽으며 마음이 답답하고 씁쓸했다.

오래전 고향을 찾은 적이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옛집은 남의 집이 되었지만, 여전히 설레었다. 조붓한 골목길을 한참 돌아야 사립문이 보이는 옛집, 한데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집 앞으로 큰 주차장이 만들어졌다. 어릴 때 뛰어놀던 옆집에 의병장 이강년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엔 기념관도 세워졌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구한말 외세의 침략으로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선생은 전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켜 13년간 30여 차례 토벌에 나섰다. 치열한 전투 중에 적탄에 맞아 피체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기념관을 돌아 나오며 일본의 만행에 울분을 삼켜야 했다. 후손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려 되찾아준 나라인가,

백범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 중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한다. 부강한 나라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선생의 뜻처럼 우리는 척박하고 어려운 역경 속에서 경제와 높은 문화를 꽃피웠다. 반도체 산업, 조선업, 영화, 드라마, k팝 등…. 경제 강국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고 선생께서 그렇게도 소원하신 문화의 꽃도 전 세계에 널리 피웠다.

해를 넘기고도 끝나지 않는 전염병으로 일상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삼일절 행사도 언택트로 진행 중이다.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운 진달래처럼, 그해 3월 암울했던 그 날도 당당히 일어섰던 것처럼, 서로를 격려하며 힘을 보태야 할 때다. 종일 비가 내린다. 3.1절의 의미가 뜨겁게 다가오는 오늘 우리의 높은 문화가 영원하길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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