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없는 날
손 없는 날
  • 한기연 수필가
  • 승인 2021.03.04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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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주말부터 연휴동안 두 번의 이사를 했다. 토요일 오후 둘째 아들과 서울로 가면서부터 진이 빠졌다. 세 시간 넘게 걸려서 큰아들 집에 도착해서 짐을 정리했다. 방을 옮길 때는 한 번도 도와주러 온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작업실을 얻어서 가는 거라 미덥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방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상자가 곳곳에 놓여 뒤죽박죽으로 물건이 담겨 있었다. 우선 근처에 가서 투명함을 여러 개 사 왔다. 어떻게 하면 짐을 가져가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종류별로 잘 보이도록 넣었다. 정리를 잘하고 나니 셋이서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잠을 더 자고 싶어 하는 아들들을 깨워 뜨끈한 국밥 한 그릇씩 든든히 먹이고 나니 도와줄 친구들과 용달차가 왔다. 서울에서의 모든 일을 혼자 알아서 처리하는 큰아들이 대견했다. 발품 팔아 마련한 작업실은 이태원 쪽에 있었는데 임대료가 싼 지하였다. 역에서 가깝고 18평 정도로 컸지만 전선이 이리저리 엉킨 콘센트는 위험하게 노출되어 있고 공기도 안 좋았다. 물 빠짐이 잘 안 되는 낡은 싱크대와 화장실이 없는 점 등 마음에 차지 않는 게 많았다. 혼자서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싼 걸 찾다 보니 제약이 많았을 터이다. 다시 한 번 물어봤다. `여기서 괜찮겠어?' 아들의 대답은 `자신 있어. 난 나를 믿어.'

얼마 전, 시험 감독을 하러 간 적이 있다. 두 번째 참여해 보는 거라 처음처럼 부감독으로 보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정감독이었다. 감독란에 정자로 내 이름을 눌러썼다. 그 무게가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시험이 끝나고 재검하면서 다른 선생님들은 맡은 바 일을 마치고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실수가 발견되고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몇 번을 확인 후 서류를 담당자에게 건네면서 `제출하기가 겁난다'라고 말씀드리니 `선생님, 자신을 믿으세요.' 하시며 밝게 웃으신다. 그 말의 여운은 며칠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일을 떠올리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지 않은 나보다 아들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비 내리는 연휴 마지막 날 개강을 앞두고 둘째가 있는 경북 영주로 향하는 길이다. 문득 `비 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는 속설이 떠오르자 작업실로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택하지 못한 미련이 남았다. 제주도의 정월풍습 중 하나인 `신구간'도 무슨 일을 해도 무탈한 이사문화이다. `신구간'에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들이 임무교대를 위해 하늘로 올라간단다. 요즘 이사는 업체의 일정과 개인의 사정이 중요한 터라 `손 없는 날'이 무의미해지기는 했으나 1% 정도 부족한 믿음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들에게 전화해서 조심스레 고사 얘기를 꺼내니 다행히도 친구들과 날을 정해 지내겠단다. 자신도 잘 해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담겼으리라.

백신 접종이 시작되는 걸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 우려와 믿음에 대한 간극도 있었다. 이사를 하면서 백신을 맞는 사람들의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이 닿았다. 큰아들의 꿈이 낡고 허름한 작업실에서 첫발을 내디뎠다. 말로는 `너를 믿어'하면서도 100% 신뢰를 보내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아들의 꿈을 전하니 자기가 1호 손님 예약이란다. 젊음으로 딛고 일어설 매일 매일이 `손 없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집으로 돌아오는 창밖으로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진다. 동티도 씻겨 버릴 참 고마운 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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