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 인생
집사 인생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1.03.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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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핸드폰을 두고 왔다. 모처럼 만에 문우 몇이 만나 저녁을 먹고 선생님 댁에 갔었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선생님의 연애담까지 들으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일어섰다. 그런데 핸드폰을 놓고 온 걸 집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밤이 늦어 다시 갈 수도 없고, 내일도 오전에는 민화 수업이 있으니 오후에나 찾아와야 할 것 같다. 책상 앞에 앉기는 했는데 책이 선뜻 손에 안 잡힌다. 이런 내 맘을 알기라도 하는 듯 밍이가 다가와 눈인사를 건넨다.
밍이는 우리 집 반려묘다. 그리고 껌딱지처럼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엄마 바라기다. 거실 소파에서 TV를 볼 때 밍이는 내 무릎 위에서 ‘밍모나이트’-몸을 둥그렇게 말아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이 암모나이트 모양과 흡사해 우리끼리는 그렇게 부른다-를 하고 있다. 안마기에 누우면 어느새 폴짝 올라와 같이 안마를 받고, 외출할 때는 현관까지 따라와 간식을 받아먹어야 들어간다. 늦둥이를 키운다면 이러려나. 남편 말이 내가 딸네 가서 자고 오는 날에는 아기가 엄마를 찾듯 밤새 야옹거린단다.
삼 년 전 처음 밍이가 왔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원룸에서 새끼고양이를 키우다가 방학이 되자 집으로 데리고 왔다. 두려움 가득한 눈빛, 그 작고 여린 생명체는 한동안 아들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었다. 시간이 흘러 서서히 안정을 찾아갈 즈음 자유롭게 나다니고 싶었던 아들은 돌연 아빠의 자리를 내놓고 오빠를 자처했다. 딸이라던 밍이를 동생으로 족보를 바꾼 것이다. 이걸 소재로 ‘묘한 족보’라는 수필을 썼었는데 아들은 아직도 엄마 글 중에 그게 제일 좋단다.
그렇게 난 고양이 집사가 되었다. 어디 고양이뿐인가? 따지고 보면 결혼하면서 남편을, 그 후 차례로 삼 남매를 집사로서 살뜰히 보살피며 뒷바라지해 왔다. 십 년 넘게 키우고 있는 앵무새도 한 마리가 있다. 물론 힘들었던 만큼 보너스까지 챙겨가면서 보상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한다. 저들 편에서는 부린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사실 대부분이 집사 마음대로 좌지우지된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저들도 알까?
책 몇 권을 가져다 겨우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모르는 단어를 찾겠다고, 책에 소개된 여행지를 검색하려고, 시간을 확인하고 일정을 가늠해보기 위해 자꾸 핸드폰을 찾는다. 퍼뜩 핸드폰 알람이 없어 내일 늦잠이라도 자면 어떡하나 탁상시계부터 찾아 놓고 보니 이쯤에서 차분하게 앉아 책 읽는 것은 포기다. 핸드폰이 없는 이 낯선 상황은 나를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렇게까지 심란해지리라곤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한참을 궁싯거리다가 생각해 본다. 조금 전 내 모습은 마치 엄마 찾는 밍이와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핸드폰을 집사로 모시고 살았었나 보다. 그저 한낱 편리한 기계일 뿐인 것을, 중독처럼 핸드폰에 매여서 쩔쩔매는 삶에 대해 아무래도 깊이 한번 고민해봐야겠다.
다음 날 어쨌든 핸드폰을 찾아 손에 쥐니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폰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숫자들을 빠르게 확인한다. 내 손길로 사라지는 빨간 숫자들을 보면서 어쩌면 핸드폰 역시 내가 보살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제부터 너도 내가 집사 해줄게!”
30년 집사 인생에 이렇게 또 하나의 이력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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