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가 씨에게
열매가 씨에게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3.0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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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자정에 가까워 길가 일렬로 주차된 차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색의 차가 일제히 흰색의 차량덮개를 씌우기 시작했다. 온종일 주춤했다 갑자기 쏟아지다 부침이 심하던 비가 진눈깨비로 바뀐 것이다. 예보는 있었지만 이런 난리가 아닐 수 없다. 내리며 쌓이는 양을 보니, 이러다 예보보다 기온이 더 내려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에 불려 밖에 내어둔 신선초씨앗, 대파, 더덕과 도라지를 파종한 모종판을 안으로 들인다. 종일 비를 맞은 판이라 제법 묵직하다.

비 소식에 이틀 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그림을 그렸다. 정원은 제법 손댈 줄 아는데 농사는 영 소질이 없다. 그래서 좀 더 고민을 하고 시도를 한다. 그러나 매년 소출은 크지 않다. 남들이 하라는 비닐 멀칭, 비료, 농약을 안 한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때를 놓치거나, 섞어짓기를 잘 못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올해는 작정을 했다. 그간 쌓아온 경험도 있고 나름 연구도 했으니 그림을 제대로 그려보자, 마음먹고 오전 반나절 그림을 옮겼다. 그간 너무 많은 욕심에 이것저것 안 해본 작물이 없을 정도니 이제 선택을 제대로 해서 배치한다면 기대만큼 소출할 것이라. 바로 오후에 행동에 들어간다. 먼저 그동안 묵혔던 씨앗, 새로 구입한 씨앗 모조리 들어냈다.

3월 초순부터 주별, 월별로 파종할 시기 순으로 늘어놓고, 직접 노지에 뿌릴 씨앗, 모종판에 심을 씨앗, 그중에서도 어두운 곳에서 틔울 씨앗, 밝은 곳에서 틔울 씨앗을 나누고, 24시간 물에 불릴 씨앗을 구분한다. 씨앗만 해도 엄청나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은 씨앗을 모아 놨는지 대단하다. 이 많은 씨앗을 심을 땅이 있기는 한 건지, 수확을 하고 남은 대를 뽑아내고 다른 씨앗을 심어도 올해 안에는 이 씨앗을 다 파종하지 못할 듯하다. 정말 욕심이 엄청난 아저씨를 만났다.

그래서 씨앗을 다시 허드레 땅에 뿌릴 것과 텃밭에 정식할 씨앗을 둘로 나누었다. 다음날 모종판과 상토를 준비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녀석들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파종한다. 그리고 물을 주고 추위를 대비해 조그마한 비닐 터널을 준비한다. 그렇게 애지중지하게 만든 모종판인데 갑자기 퍼붓는 눈에 냉해라도 입을까 걱정에 하우스로, 집안으로 들였다. 자연의 시간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몸이 앞서는 자의 비애다.

한 해의 수확은 매년 1월에 머리로 한다. 그러나 실상 수확 철에는 그리 좋은 성과가 없었다. 작물별 배치를 잘못한 탓도 있고, 주말을 이용해 기르다 보니 때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올해는 좀 더 철저하게 기록하면서 파종시기, 정식시기를 잡고 토양을 만든다. 토양도 염기성인지 산성을 좋아하는지, 깊이 갈아야 하는지, 발아도 빛을 좋아하는지 차단해야 하는지에 따라 배치를 달리한다. 사이사이에 벌레가 싫어하는 차이브나 벌레를 유인하는 쌈 종류도 같이 배치한다. 마음을 아는지 차이브는 겨울을 이겨내고 벌써 순을 올렸다.

몇 평 안 되는 뜰의 정원을 관리하는데 신경을 쓰느라, 먹거리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다. 심고 싶은 대로 필요한대로 심어 그때그때 뜯어다 먹었는데, 맛이 좋고 기간을 길게 먹을 수 있는 것에는 열매를 기다렸다. 씨를 받아 좀 더 맛나게 먹어보려는 계산이었다.

농사를 지으며 비닐멀칭을 하지 않고 농약을 주지 않고, 만족할 만한 수확을 얻으려면 더 많은 것들이 어울려 자라게 해야 할 듯하다. 그래서 올해는 좀 더 다양한 씨앗을 뿌리기로 했다. 손이 많이 가지만 서로 경쟁하고 도와주면서 살아갈 텃밭을 그려보면서, 또 한 해를 움직인다. 양질의 꽃과 열매는 양분이 아니라 물 빠짐과 통풍과 많은 것이 서로 어울려 자라게 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현명한 열매가 멍청한 아저씨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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