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댕이골 연가 2
검댕이골 연가 2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1.03.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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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검댕이골에서 여섯 번째 해가 지고 있다. 어제는 눈 속에서 망초 새순을 뜯어와 된장에 무쳤다. 묵은 지와 마트 채소만 먹던 입맛이 새롭다. 오늘도 산책하면서 햇볕이 잘 드는 빈 밭을 들여다보던 그녀의 눈에 냉이가 보였다. 사춘기 계집애들처럼 갈갈거리며 깊이 박힌 냉이뿌리를 캐면 산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심 봤다를 외치며 냉이 캐기에 푹 빠졌다.

호미도 없이 맨손으로 냉이를 캤다. 흙내가 어떤 향수보다 향기로웠다.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나물이야기, 4잠을 잔 누에를 먹으면 공부 잘한다는 할머니 말씀에 살아 꿈틀거리는 누에를 뽕잎에 싸먹던 이야기를 동화처럼 들려주었다.

오늘 저녁엔 혹시나 해서 가방에 넣어 온 와인을 꺼내야겠다. 검댕이골에서 마지막 저녁 만찬은 와인을 곁들인 냉이무침과 된장국이다.

숲만 바라보고 있어도 즐거웠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댕이골 바람이 기분 좋았다. 우리는 별말 없이 함께 있었다. 편안한 침묵 속에서 서로의 시간을 충분히 즐겼다. 여유롭다, 한가롭다, 걱정이 없다, 내가 편한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것이 유유자적한 거로구나 하면서 한껏 늘어져 검댕이골에서의 시간을 즐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렇게 살아도 좋은 것을, 육십 중반에 와서 돌아보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 본 기억이 없다. 누구나 혼자 여행을 꿈꾸지만 막상 길을 나서면 어색하고 긴장된다. 집에서는 호기롭게 가방을 싸지만 길을 나서면 두려움도 있다. 다만 일상을 탈출했다는 설렘과 홀가분함과 약간의 자유로 흥분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검댕이골에서 함께 고립의 자유를 누린 그녀와 어떤 날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날은 서로의 생각에 잠겨 침묵했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했다. 자신에게 인색했고 게을렀고 핑곗거리를 찾았다. 나에게 아닌 다른 누구에게 시간과 돈을 양보하고 나는 언제나 나중으로 미뤘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았다. 후회하거나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 조금 아쉬울 뿐이다. 어디 나만 그렇게 살았을까. 산다는 것은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안으로 삼키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 말 못하고 꿀꺽 안으로 삼키며 삭이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검댕이골에서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그런데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다가 햇볕이 잠시 나왔다가 잿빛 얼굴을 하다가 다시 주먹만 한 눈송이가 쏟아진다. 날씨가 내 발목을 잡는 것 같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도 여행의 출발보다는 못하지만 조금 설렌다. 며칠 떠나있던 일상이 또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검댕이골에 와서 특별히 의미 있는 일을 했거나 재미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온전히 나만을 위해 내 시간을 가졌다는 것에 의미가 크다. 나를 위해 시간과 용기를 냈다. 지금 내가 검댕이 골에 와서 머무는 이 시간이 내생에 특별한 일이다. 각자 사는 환경과 방법이 있으므로 아무 때나 거침없이 떠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일상이겠지만 그 일상이 나 같은 사람에겐 특별한일 일 수 있다.

벌써 예약된 시간이 다 지나갔다. 좋은 시간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빨리 달아난다. 일 년에 며칠만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다면 세상은 변할 것이다. 그 흔한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말을 검댕이 골에서 찾았다. 볕이 좋고 바람이 부드러워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바람 끝이 차다. 다시 내게 오는 봄을 반갑게 맞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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