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시냇가에서
봄날 시냇가에서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1.03.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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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겨울이 깊을 때 봄은 이윽고 가녀린 태동을 시작한다. 두꺼운 얼음 밑을 흐르는 작은 물이 차츰 얼음의 두꺼움을 낮추면서 끝내는 얼음 위를 흐르게 된다. 봄은 이처럼 인내하며 긴 호흡으로 우리 곁에 찾아오곤 한다. 세상 일에 분주한 사람에게도, 자연에 묻혀 한가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봄은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봄의 도래가 실감 나는 것은 아무래도 후자일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성혼(成渾)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봄날 시냇가에서(溪上春日)

五十年來臥碧山(오십년래와벽산) 푸른 산속에 누운 이래로 오십 년인데
是非何事到人間(시비하사도인간) 시비가 무슨 일로 세상에 왔단 말인가?
小堂無限春風地(소당무한춘풍지) 작은 집은 끝 없는 봄바람이 있는 곳이고
花笑柳眠閒又閒(화소류면한우한) 꽃은 웃고 버들은 잠들어 한가하고 한가하여라

시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만 머문 듯하다. 50년을 푸른 산에 누워 지냈다는 술회가 이를 뒷받침한다. 50년이면 인생의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긴 기간인데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한 것일까?

그 대답은 산에 있을 것이다. 사시사철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발산하는 산의 매력이 시인을 평생 그곳에 잡아 놓았을 것이다.

산이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은 인간사에 만연한 시시비비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부와 명예라는 허상에 이끌려 시시비비로 얽힌 세속에 사는 것은 사람을 구속하고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세상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산 것이다.

시인이 삶을 영위하는 산속 거처는 결코 고대광실과는 거리가 먼 소박하고 작은 집이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고대광실의 금은보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물이 가득 차 있으니 봄바람이 바로 그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봄바람과 함께 온 친구들도 시인에게 귀한 보물이었다. 꽃은 상큼하게 웃고 버드나무는 느긋한 잠을 즐기는 곳이 바로 시인의 작은 집인 것이다.

인간사의 번거로움은 딴 나라 얘기일 뿐, 이곳은 한가롭고 한가로운 느낌으로 충만하다.

부와 명예를 잠시 떠날 수는 있겠지만 한평생을 자연에 묻혀 한가로운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 삶의 이치를 간파하고 그 이치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이기 때문이다.

비록 한평생은 아니더라도 삶의 부분 부분을 자연의 이치에 따를 수 있다면 그 삶은 부와 명예에 평생을 찌든 삶보다는 훨씬 윤택하고 아름다울 것이 분명하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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