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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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6.2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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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관점이 우리사회에 유익한가
김 남 균 <민주노총충북본부 前 사무처장>

오래전, 이곳에 쓴 나의 글에 대해서 댓글이 달렸다. 댓글의 요지는 저의 시각이 일방적으로 한곳만 바라보는 편협함의 극치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비이성의 광기'란 나의 글을 뒤집어 '광기어린 비이성'이라고 나를 놀려댔다.

요즘, 상생(相生)이란 말이 유행하는데, 노동조합운동의 일선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게 이 말처럼 난해하게 느껴지는 그 이상의 단어는 없다. 과연 노동자와 자본가, 노-자관계에 상생이란 존재하는가! 상생이란 말의 반대편에는 '서로 물어 뜯다가 같이 죽는' 그런 개념이 있을텐데 난 아직 그런 개념을 현실로 목격한 적이 없다. 쉽게 말하면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체인 노동조합 때문에 자본, 즉 회사가 망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얘기다. 여태까지 눈뜨고 내가 본 것은 월등한 힘을 가진 것은 항상 자본이었고, 그 힘의 관계에서 결과는 불보듯 항상 그런 식이었다. 칼자루를 쥔 사람과 벼랑끝에서 칼날을 맨손으로 막아선 사람에게 상생의 전제조건인 상호 양보란 것이 실은 얼마나 불평등한가. 연간 순이익만 수조원을 올리는 대기업 하이닉스가 노동조합 만들었다고 연봉2000만원 10년차 비정규노동자를 한순간에 잘라버렸다. 그렇게 쫓겨난 이 1회용 비정규노동자들이 상생을 위해 양보할 것이 존재하기나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 싸움, 대기업과 비정규노동자 사이의 이 싸움 끝은 너무나 뻔하게 예견되어 있었고, 그렇게 끝났다. 너무나 눈이 부시게 처절할 정도로….

하이닉스 비정규노동자들의 문제에 있어서 이들 사이엔 상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밥줄(한 가족의목숨줄이다) 끊긴 노동자들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지 하이닉스란 대기업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난 매우 편협하다. 노동문제만 나오면 난 노동자의 이해관계에서 잔머리를 굴려보고, 그 속에서 행동반경도 가지려 한다. 난 이것이 우리 사회의 보다 많은 사람들, 다수에게 유익할 것이라고까지 확신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운동이 올바를 수 있었고, 많은 놀라운 결과들(제도와 인식의 변화)을 만들어 낼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보편적 기본권과 평등권을 옹호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처럼, 노동자 운동 또한 그 기본적이 성격이 같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의 차별철폐 운동, 그리 오랜 시간의 뒤안이 아니라 얼마전까지만 해도 장애인들의 기본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지만, 이제는 국영방송의 광고조차도 '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라고 이야기할 정도까진 왔다. 우리사회는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보편권과 기본권이 일시적 기복을 닫긴 했지만, 역사적으론 확장되는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다. 왜냐면 그것이 옳았기 때문에….

나는 편협함이란 것, 대립적이고 때론 적대적이기까지 한 양대 집단속에서 어느 일방의 이익을 주장한다는 것이 결코 편협함이라 보지 않는다. 진짜문제는 그 편협함이 누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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