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향기 속으로
사색의 향기 속으로
  •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1.02.22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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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한겨울임에도 꽃향기에 취한 나. 눈을 감으면 잡힐 듯 말 듯 꽃향기에 젖어들어 기억 끄트머리에 있는 추억을 끄집어내 사색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내 마음을 훔친 건 향초다.

얼마 전, ㅇㅇ기업의 고객만족도 설문조사에서 당첨되자 사은품으로 향초가 배송되었다. 모란꽃보다 더 붉은색의 달콤하고 매혹적인 블랙체리 향초, 금방이라도 보라색 이슬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상큼하고 부드러운 라벤다의 절묘한 향을 지닌 라벤다 향초, 순수하고 깨끗한 아침 햇살 같은 클린코튼향의 향초, 세 가지가 저마다 유리컵 속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바라만 보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색상의 향초는 포장을 뜯지 않았음에도 온 향기가 점령하는 양 이미 난 향기에 홀려 있다.

그날, 정열적인 빨간색의 블랙체리 향초에 망설임 없이 불을 붙였다. 이내 심지를 따라 오목한 분화구가 생기면서 일렁이는 촛물, 입김을 슬쩍 불어넣자 가랑가랑거릴 뿐 한치 어긋남 없이 일정한 크기의 분화구의 촛불은 과묵한 선비처럼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킨다. 그래서였을까 촛불은 성스런 날이나 아픔 그리고 간절히 원하는 구원의 상징이 되어 우리 곁에서 동고동락하고 있다. 때론 한목소리로, 한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또 아픈 이들에게 침묵으로 그들을 위로하면서 하나, 둘 모인 촛불은 거대한 성을 만들어 함께했고, 거리로 모여든 촛불은 엄청난 촛불의 물결을 이뤄 한곳을 향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린 곳에 촛불은 성스럽게 밝히면서 간곡하게 호소하는 이들에게 하나가 되었다.

촛불은 고고한 선비의 모습을 닮았다. 화려하고 다양한 향을 지닌 향초, 타오르는 촛불을 가만 보면 단아하고 고매하다. 작은 입김에도 개념 없이 흔들려 지조 없는 듯한 촛불, 외려 아무리 흔들어도 흐트러짐 없이 활활 불태우는 촛불은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 세찬 바람에 온몸이 찢기고 휠지언정 굽히지 않는 대나무처럼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신의를 지키는 선비 모습이다. 뿐인가 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 저리도 작은 몸에서 어찌 향기는 그리도 멀리멀리 퍼지는지 요즘 들어 현관을 들어서면서부터 향초 향기를 맡으려는 듯 코를 벌름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촛불은 희망이고 추억이다. 동방에 비치는 환한 촛불, 낡은 영화 필름으로 스크린 화면에 비가 내리는 흑백영화처럼 빛바래고 있는 세월 속의 한 장면인 동방화촉(洞房華燭). 신랑 신부 첫날밤 동침의 의식을 이르는 동방화촉, 저마다 고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촛불이다. 또한 서양에서의 촛불은 생명의 등불이란 의미로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는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걸 보면 촛불은 희망으로 우리의 마음을 따습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촛불은 흔들거리며 제 몸을 태운다.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촛불이 우리 곁을 조금씩 눈에 띄게 작아지면서도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는 촛불. 시간을 잡으려 헛손질해도 부질없는 일, 오늘만은 아주 느리고 더디게 시간이 흘러가면 좋으련만. 처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잔하게 파고드는 향초의 향기, 향기로운 꽃향기는 백리를 가고, 좋은 술 향기는 천리를, 인품이 훌륭한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했다. 굳이 자신을 알리려 요란스레 굴지 않아도 먼발치에서 향기로 전해지는 향초 향기, 굳이 나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아도 절로 알아보는 향초 같은 그런 사람이 되길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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