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정오가 온다
위대한 정오가 온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1.02.2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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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제멋대로 자라 멋진 정원수가 된 조선소나무에서 불굴의 신념을 읽는다.

거친 들녘에서 비바람 맞으며 견딘 시간들이 승화한 예술의 흔적이다. 덤불을 헤치며 샛길로 나간 이들이 빚은 인류의 역사도 보편에서 이탈한 마이너리티들의 행보이다.

진보는 대체로 악한 환경과 위기 속에서 진행돼왔다. 결국 악한 환경을 발판으로 꿈틀거린 온전한 `선'의 승리인 것이다.

문우들과 황석영 소설을 논하다가 “인간은 저 스스로 자신 없다고 생각하면 덫을 놓는다”는 문장 하나를 놓고 장시간 갑론을박을 폈다.

덫은 교활한 자들이 쳐놓은 비겁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정말 자신 없는 사람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섶에 누워 쓸개를 씹는다. 모든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의미다.

니체는 자기 돌봄을 실종한 맥없는 노예도덕을 경멸한다.

착한 자들은 진리를 말하지도 않고 복종에 익숙해져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분별없이 착하기만 한 터전은 악이 움트는 발판이다.

부딪힘 속에서 변화도 일어난다. 약한 자는 덫을 놓을 수도 없고 그런 용기조차 없다. 다만 덫은 교활한 자의 비겁한 꼼수일 뿐이다.

점점 제소리를 낼 줄 아는 젊은이가 늘고 있어 다행이다.

그들도 이미 소리 없는 착함이 비루한 것임을 안다. 얼마 전 아들이 어렵게 입사한 큰 기업체를 과감히 그만두고 나왔다.

지나친 정의감과 배려심이 몸에 밴 아들의 성격은 MPTI 성격 검사 결과 전 세계 1%만 갖고 있다는 마더테레사 수녀와 같은 유형이다.

그러니 이기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어 안 봐도 어떻게 살았을지 가늠한다. 연구개발팀 소속이니 워라벨의 삶은 애초 꿈꾸지 않았지만,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품이라 아무래도 부딪힌 모양이다.

본성이 남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참고 견딘 시간들을 표정으로 짐작할 뿐이다.

유능한 연구원을 붙잡기 위해 놓은 회유와 덫에 더 상처받았다는 아들의 얼굴에 굳은 결기가 감돈다. 편법 없이 실력과 정의로만 정정당당 계단을 오르는 사회구조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찌하여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은 헬 조선이 되었을까? 그래도 불의한 것을 알면서도 `아니오'라고 말하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권력에 손잡지 않았으니 어미보다 낫다.

부정의에 맞선 소수의 항변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 요지부동한 일이다.

불의를 견디지 못해 스트레스성 두드러기에 시달린 아이를 보니 인간의 도덕엔 계절이 없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지난날의 가르침이 자책감으로 밀려온다. 차라리 비위 맞추는 법을 가르쳤더라면 어땠을까?

옳지 못하면 스스로 그 주변을 떠나는 어미의 성향과는 달리 아들은 불의한 것엔 행동으로 저항하는 분명한 성향이다.

세상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고 내보낸 어미 탓으로 고통을 겪는 아들이 안타깝다.

그래도 회유한 덫에 걸리지 않고 자신의 본 전공을 살려 연구원의 길을 찾아 도전한 아들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선과 정의를 이뤄낸 아이, 악과 부딪히면서도 끝까지 소신을 지킨 아들의 정의를 이젠 적극 지지할 것이다.

자기 상실의 시대에 건강한 자아를 지켜내는 젊은이들, 달콤한 덫에도 아랑곳없이 원칙을 지키며 정의를 세우려는 젊은 미래가 온다. 그 위대한 정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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