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의 역사
내 머릿속의 역사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1.02.1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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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생각을 없애보려고 한 사람은 머리를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한 생각을 온전히 지우면 그 사람은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다. 내 머릿속의 생각들은 언제부터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을까?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는 생각들일까? 그런 생각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태어나서 입력된 생각들이다.

내 머릿속의 역사에 관한 의식도 언젠가 입력된 생각들이다. 나는 자라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웠다. 그를 통해 형성된 역사관이 내 머리를 채우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체벌을 받아 가면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다.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다. 내 생명의 과업이 민족중흥이라니. 내 삶의 범위가 태평양과 같다면 민족중흥은 조그만 저수지 정도라고나 할까? 그 넓은 걸 그 좁은데 쑤셔 넣어서 상상력을 극도로 위축시켜놨다. 위정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국민을 개조하기 위하여 일본의 명치 유신을 닮은 10월 유신을 하겠다고 덤벼들었다. 헌법을 뜯어고쳐 장기독재를 하다가 결국 부하의 총탄을 맞아 비명횡사하기에 이른다.

그런 일을 시도한 사람은 없어졌지만 그 사람들이 심어놓은 역사관은 머리에 남아 있다. 대학에 들어와 역사를 배우면서 내 머릿속에 심어진 역사관이 상당 정도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자란 세대는 이승만-박정희의 역사 프레임이 친일 세력의 자기 정당화라는 걸 알 수 없다. 나중에라도 역사의식의 문제를 발견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 머릿속의 역사는 대학에 부임 이후 또 한 번 달라졌다. 어느 날 총장이 불러서 우암 송시열 연구소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내가 처음 보인 반응: 송시열은 나쁜 사람이잖아요? 왜 나빠? 나라를 말아먹게 만든 원흉으로 나쁜 사람이잖아요? 사색당쟁이 조선패망의 궁극적 원인인데 그 파벌과 당쟁의 시작이던 서인과 노론의 우두머리가 송시열이라는 역사교육을 받고 자란 나에게 우암 연구소는 가당치도 않은 일로 여겨졌다. 우여곡절 끝에 우암 연구소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조선 패망의 원인이 사색당쟁이라는 내부 요인이 아니라 일제 강점이라는 외부 요인이었으며, 한일합방의 원인을 조선 내부에 덮어씌우고자 한 건 일제 통치의 정당화를 위한 역사 왜곡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조선의 과거 역사는 비생산적인 논쟁과 파벌로 사분오열되어 국력이 쇠퇴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힘없는 나라가 되어 결국 일본에 합방되어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되었다는 식민사관이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 영화나 드라마는 아직도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더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가 정통성 있는 내부의 독립세력을 일본에 의지하여 제거하려고 함으로써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겪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친일 군사독재 세력이 심은 역사관에 의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재단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역사 자체를 계속해서 폄하하고 자책하면서 엽전은 어쩔 수 없다는 타령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약소국에서는 일본이 아니면 미국에라도 의지하여 국가를 존속해가야 한다는 망령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패배의식이 뇌리에 남아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불행하게도 이런 생각들이 상당수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 기성세대들이 자학적 역사 프레임을 갖고 있는 한, 그리고 이들이 후대에 자신의 역사의식을 전수하는 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현대화, 국제화하려는 한국판 르네상스(Korea Renaissance)를 이룬다는 건 불가능하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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