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山)을 보다
먼 산(山)을 보다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1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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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봄날처럼 푹한 날에 먼발치에서 우암산을 보았다.

마침 미세먼지도 `보통'이었고, 모처럼 한겨울 구름도 걷혀 청명한 날이었다. 강가에서 서성거리며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은, 산에 오르며 숲길을 헤매는 것과는 다른 아득함이 있다. 능선을 따라 우람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는 산의 자태는 다르지 않으나 모습은 예전 같지 않다.

우암산이 변하고 있다. 남쪽에서 길게 정상으로 이르는 산자락에 푸른빛이 사라진 것이 뚜렷하다. 물기를 머금었던 나뭇잎들을 모두 떨구고 맨 몸과 속살로 활엽수들이 겨울을 견디고 있는 요즘, 그 푸른빛의 실종은 계절을 떠나 확연하다.

우암산에 소나무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일일이 세어 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지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인공으로 조성한 자동차 길옆이거나 북쪽 사면, 아니면 가파른 능선의 정상부근에 쇠잔한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청주의 안산이며 주산인 우암산은 여러 가지 자랑거리가 많다. 나는 그 가운데 으뜸으로 종 다양성을 꼽는다. 갖가지 식물이 어우러져 사시사철 다채로운 향기와 자태를 자랑하는 우암산의 종 다양성은 북방과 남방의 식물한계선이 겹치는 지정학적 위치이기에 가능했다. 난대성 식물과 한대성 식물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 우암산이었다.

식물 군집은 장소의 상황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황무지에 맨 처음 이끼나 박테리아 등의 선태류나 지의류가 나타났다가 풀과 억새 등으로 대표되는 초원을 거쳐, 키 작은 나무가 군집하는 관목림, 소나무로 대표되는 침엽수가 군락을 이루는 양수림의 시대를 지나 소나무와 떡갈나무 등이 공존하는 혼합림을 이루다가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등의 활엽수가 위세를 떨치는 음수림(극상)의 순서로 바뀌는 식물군집의 변화를 천이(遷移. succession)라고 한다.

남쪽 기슭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 마른 잎을 달고 있거나 빈 가지로 겨울을 견디고 있는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참나무 등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우암산의 먼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가파른 북쪽의 기슭에 남은 푸른 소나무의 실팍한 군락도 아직은 의연하나, 아마 우암산은 지금 제 뜻과는 달리 혼합림의 끝자락을 거쳐 극상이라 불리는 음수림을 향해 서둘러 늙어가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우리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우암산의 변화가 사뭇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암산은 기후변화 같은 환경 요인과 생태계 교란, 외래종의 유입 및 급격한 도시화가 원인을 제공하는 생태적 천이(ecological succession)의 뭇매를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고스란히 맞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 먼발치에서 우암산을 바라보니 혼란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절로 커진다.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 그리고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려 지루한 시간과 공간 사이사이를 다투는 것은 저마다 제각각의 몫이다. 우리는 살아 있으므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최선을 다하는 지극히 한정된 세계에 갇혀 있다.

멀리 있는 우암산을 바라보다 소나무 청정한 푸른빛의 기운이 밀려나는 모습에 탄식하며 인류세(Anthropocene)를 떠올리는 내가 병적인가. 아님 자식에게는 그토록 끔찍하며 정작 그들이 살아가야할 땅과 공기와 물, 그리고 화학물질과 방사능의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율배반적 미래가치관이 더 아픈 것인가. 인류는 기후가 비교적 안정돼 있다고 분류했던 홀로세(Holocene) 지질시대를 스스로 현재에서 제외시켰다. 인류세는 인간이 단순히 지구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영향을 준 위험한 집단임을 경고하는 기준에 해당된다.

끔찍한 것은 수천만년의 지질시대를 불러들여 인류세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위험은 수천년에 불과한 인류의 문명에서 대부분 만들어졌다는 것. 멀리 보고 눈 들어 하늘 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 한 그루 한 그루 나무 숫자를 세며 천천히 먼 길 시작하는 소나무로 살아남아야 할 우리. 설이 지났으니 신축년 새해는 비로소 시작이다.

※ `인류세'라는 말로 지구를 경계한 이는 네덜란드의 대기 화학자 파울 크뤼천 박사. 그는 지난 1월 지구와 영영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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