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봄
봄을 봄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2.1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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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2월의 날씨라 하기에 날이 따뜻하다 못해 덥다. 덥고 건조한 날씨에 온종일 몸을 움직인다. 병이다. 휴일이면 잠시도 앉아 있지를 못한다. 날이 풀리니 더더욱 물 만난 물고기다. 몸 안의 열기를 못 이긴 땀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이마로 이동해 송골송골 자리를 차지한다. 걷어붙였던 소매를 풀어 훔친다. 이젠 몸 안에서 삐질삐질 땀이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속옷에 도움을 요청한다. 아! 시원한 물 한 모금이 생각난다. 고개가 젖혀지고 입이 자연스레 벌려진다.

순간 커다란 물방울이 튄다. 물에 흠뻑 젖은 직박구리가 감나무 가지를 힘껏 움켜쥐고 몸을 털어댄다. 이런 겁대가리 없는 녀석이 있나? 더운 날에 미스트를 뿌리는 장치도 아니고 간 큰 녀석 같으니라고. 물을 털어내고 포마드를 바른 양 말쑥해진 직박구리는 눈치도 없이 하늘만 물끄러미 쳐다본다. 능청스러움하고는 거리가 멀게 보이는 녀석, 뻔뻔스럽다. 문짝보다 커다란 돌판에 커다란 푼주 모양의 구덩이 주변이 온통 물난리다. 더운 날씨에 시원하게 목욕을 한 것이다. 그 물은 길양이와 주변 새들의 물만 먹고 가는 식수인데, 독차지하고 난리를 쳐 놓은 것이다. 뻔뻔하게 고개를 돌리고 날아가지 않은 이유는 아직도 성에 안 차 재차 목욕을 하던 참이었나 보다,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쏜살같이 내려와 물난리를 치고 줄행랑이다. 물이 반 이상 줄어들었다. 내가 마실 물은 잊은 채 우물을 길어 물이 넘치도록 채워준다.

오늘은 유독 새들이 많이 날아든다. 텃밭이고 감나무 밑이고 비둘기들이 영역 싸움하듯 괴성을 지르며 연신 부리로 땅을 헤집고 쪼기를 반복한다. 참새들까지 가세해 부산스럽다. 더운 날씨에 정신까지 없다.

혹시나 싶어 새들이 자리를 뜬 사이에 낙엽을 헤집고, 아랫단의 볏짚을 헤집는다. 역시나 무엇인가가 있다. 새끼손가락만 한 커다란 번데기가 뾰족한 꽁지 부분을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커다란 나비가 될 만한 늠름한 녀석이었다. 날이 풀렸다고는 하나 다른 곳은 2~3Cm 정도 언 땅을 드러내고 나야 땅이 파지는데, 이곳의 흙은 보슬보슬하니 손가락 마디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수분을 머금은 떼알이다. 지난해보다 더 추워 넉넉히 보온을 했는데, 지렁이들의 노력도 한몫한 듯하다. 헤집은 김에 손가락 다섯 마디를 동원해 조금 옆쪽을 조심스럽게 들춰낸다. 수선화와 구근 아이리스, 히아신스가 차례로 순을 올리고 있었다. 너무나 두꺼웠던 겨울옷 때문이었을까? 촉이 짧지만 두툼하다. 혹한의 겨울에 금목서, 서향이 꽃눈을 잃어 속상했는데, 이 녀석들을 보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앞으로 며칠 더 춥다 하니 조심스럽게 들췄던 겨울옷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새들이 아니었으면, 성묘도 일찍 다녀오고, 차례도 다섯 식구가 오붓이 지내고, 설 명절 연휴의 이틀은 오로지 내 시간. 날도 푹하겠다. 집안 곳곳 손이 안 가는데 없이 꺼내놓고 정리하고, 수선하며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집안으로 들어가는 날이었을 것이다. 겁대가리 없는 직박구리와 진득하니 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참새, 갑자기 괴성을 질러대는 비둘기가 공간을 새롭게 채워주니 덩달아 다른 시간을 본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화분에 가지를 늘어트린 영춘화와 미선이, 겨울옷도 얻어 입지 못해 거친 피부를 드러내놓고 돌덩이 같이 움츠려 있는 복수초, 추울수록 망울을 키운 매화가 잊고 있었던, 바로 앞에 와있는 시간을 알려준다.

너무나 춥고 외로운 시간을 달래주는 집안의 것들, 연륜을 더해가고 숫자를 늘려가는 가족이 그동안 잊고 있던 시간을 초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을 새들이 일러준다. 봄의 새소리는 겨울의 새소리와 다르다. 겨우내 깊숙하게 안으로 들였던 속을 토로하는 애절한 소리가 아니라, 좀 더 상쾌한 공기와 해후하는 청아한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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