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발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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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6.1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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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각기 다른 빛깔을 지닌 사랑이어라
박 정 원 <한국교원대 부설 월곡초등학교 교사>

"띠리리리" 얼핏 잠이 든 나는 손 전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수화기를 갖다댔다.

"선생니임, 지는 준호할민데유."

"아이구 선생님, 어찌 그리 황망히 가셨대유 말씸도 없이유. 우리준호가 밤만 되면 몇날 며칠 선생님 타령을 하는구만유. 지맘이 이런데 울 애기 맘이 어떻것이유"

"죄송해요." 수화기 저편에 준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이 버리고 야반도주한 엄마처럼 죄스럽고 미안해서 가슴이 아팠다. 스물두해의 교직생활을 되짚어보며 반성하고 있을 즈음 영동군 작은 학교에서 12명의 씨앗들이 내 꽃밭으로 놀러 왔다. 눈이 반짝 반짝 빛나 하늘을 담고 있지만, 대부분 결손가정으로 엄마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특히 산막리에서 학교 버스를 타고 오는 준호는 이가 새까맣게 삭아 있고, 까칠한 작은 손이 모두 터져 있었다. 이름만 겨우 쓰는 준호는 입학 첫날부터 내 뒤만 졸졸 따라 다녔다.

"선생님, 준호는 밥 대신 과자 먹고 학교 왔대요. 아침부터 과자 먹으면 이가 다 썩죠"

"씨, 김태범 너 죽어. 누나가 밥 안줬단 말이야." 동트기 전에 밭일 나가시는 할머니를 대신해 3학년 누나는 아침을 차리다말고 학교버스의 빵빵 소리에 뛰어나왔단다. 까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나는 가지도 치고 거름도 줘야하는 꽃밭지기의 손길이 필요함을 느꼈다.

아무리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교문 앞 상수리나무까지 나와서 아이들은 나를 기다렸고, 아침마다 따뜻한 코코아를 같이 마시고 '치카치카' 노래를 하며 양치를 했다. 교실 옆 복숭아밭에 구슬만한 복숭아가 달렸을 때 드디어 준호는 읽기 책 첫째마당을 모두 읽었다. 글씨는 삐뚤빼뚤 했지만 짧은 동화책을 같이 읽을 때마다 물과 햇빛을 준만큼 쑥쑥 컸고 꽃밭지기인 난 참으로 행복했었다

교문 앞 자두과수원 꽃이 필 때면 벌을 피해가며 꽃잎을 관찰했고, 종은이 엄마가 해준 쑥깨떡을 먹으며 까매진 이를 보면서 서로 놀려댔다. 아이들이 내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배웠고 자연을 느꼈다. 동네 앞 냇가에서 멱감던 아이들과 유진할머니가 밭에서 뜯어다준 상추에 밥을 싸 먹으며 그림처럼 난 스물 두번째 교직생활을 보냈다. 12명의 여린 싹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무뎌지고 있는 꽃밭지기의 맘을 따뜻하게 녹여주었고, 햇병아리교사처럼 나는 그들을 맘껏 사랑했다. 종은이네 자두 밭에 꽃이 피면 다시 보러 오겠다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채 , 얼마 전 스승의 날에 12장의 연애편지를 받았다. 알찬 열매를 꿈꾸는 12개의 튼실한 씨앗으로부터 말이다.

털썩 주저앉아 있는 나를 잡아 일으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꽃밭지기의 첫 열정을 회복시켜준 그들은 각기 다른 빛깔을 지닌 사랑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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