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멀어질수록 깊어지는 노래
설날, 멀어질수록 깊어지는 노래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0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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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그때, 서울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 삼겹살거리 길 건너 서문동에 `차부'라고 불리는 버스터미널이 있었고, 그곳에서 `합승'으로 불렸던 시외버스를 타는 일이 서울 가는 길의 시작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주 좁아 보이는 서문우동 앞길을 따라 작은 버스를 타고 조치원까지 간 뒤, 조치원역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궁핍한 살림살이를 면하기 위해 어머니는 장사를 시작했고, 서울 가는 길은 낮 동안의 장사를 위한 `물건'을 떼기 위해 꼬박 밤을 새워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10살이 채 되지 못한 때로 기억합니다. 엄마를 따라 처음으로 서울 가는 길은 잠을 잘 수 없다는 서러움 대신 큰 시장에서 맛난 것을 먹을 수도 있겠다는 어린 나이의 기대가 더 컸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아! 그러나 그 길이 한숨도 자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 사이를 애처롭게 끌려다니며 고기 국밥은 커녕 난생처음 보는 국화빵 한 조각조차 물어보지 못하는 고난의 길이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다시 밤기차를 타고, 합승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집밥이 아닌 `사먹는 밥'을 먹어보겠다고 생떼를 부렸던 기억이 어느새 50년은 넘었지 싶습니다.

그때가 어머니에게, 그리고 5남매가 올망졸망한 우리 가족에게 굶지 않고 살아남아야 하는 가장 힘겨운 시절이었겠지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 해 설날, 내 서러웠던 기억에 또다시 눈물을 훔치시며 울다 지쳐 잠든 어린 나를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는 어머니의 회상. 그 눈물과 한숨을 보며 가슴이 저린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느끼면서 나도 어른이 되었고 아비가 되었습니다.

사랑할수록 가지 말아야 하고, 그리울수록 조금 더 참고 견뎌야 하는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설날을 다시 맞이합니다.

오지 말라고, 갈 수 없다고, 내년 설에 깨끗한 세상이 되면 찾아뵙겠다고 약속하며 송구스러운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는 시절의 수상함을 더 이상 거듭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평화로웠던 시절의 귀성과 귀향, 그리고 역귀성이라는 이름의 도도했던 흐름이, 쓸쓸하고 적막한 고향과 늙으신 부모에게 얼마나 위로와 위안이 되었던가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깊은 성찰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시간입니다.

어쩌면 그동안의 우리는 숱한 고향 가는 길을 그저 치러야 하는 숙제처럼,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무미건조하게 되풀이해 온 것은 아닌지요.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가슴 속에 겨우 남은 깊은 인연을 그저 얼굴 한번 쓱 살펴보고 차례와 성묘, 세배까지의 절차를 쏜살같이 치르고 서둘러 귀가하면서 마침내 사람 노릇을 다 했다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하는 가식의 행렬을 거듭해 온 것은 아닌지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할머니는 생전에 무엇을 좋아하셨고, 나를 어떻게 키웠으며, 힘겨운 시절에 어떻게 기대고 위로받아 왔는지를 깊이 되돌아보는 시간은 설 연휴 나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지 못하는 자식 손주들에 대한 그리움과 궁금함으로 사무치는 늙은 부모의 불안을 헤아리기 위해 기억을 되살리며 잊지 말아야 하는 일. 빛바랜 어린 시절 사진을 꺼내보며 나의 역사가 지금도 이어질 수 있도록 사랑과 희생, 헌신으로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은 인연의 깊은 곳을 응시하는 시간으로 설 연휴를 채우려 합니다.

다만 가지 못하고, 오지 말라는 체념의 한숨이 고향과 내 모든 인연들에게 고립이라는 불안함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각별하게 깊어지는 설 연휴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고립되어 외로움이 사무치는 마음은, 마음이 이어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치유해야 합니다.

멀어질수록 깊어지는 인연을 위해 추억을 공유하면서 은혜로움의 깊이를 생각하는 일. 그리고 그동안 찾지 못했던 공감대를 찾아 허전함을 채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올해 설 연휴에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트로트를 열심히 들어 볼 것입니다. 영상통화로 노래를 함께 들으며 엄마에게 맞장구를 치는 일. 노래가 가슴에 공감의 진동을 만들어 서로를 위로하는 설날이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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