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과 지석영 그리고 충주
백신과 지석영 그리고 충주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1.01.2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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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요즘 가장 핫한 이슈는 바로 `코로나 백신'이다. 백신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백신은 1796년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당시 사망률이 40%에 달했던 천연두를 치료하기 위해 처음 개발했다.'라고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18세기 말 제너는 우두에 걸린 적이 있는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1796년 소젖을 짜는 여인의 손바닥에 생긴 종기로부터 고름을 채취, 8살 소년의 팔에 넣게 된다. 그 소년은 팔에 상처 몇 개만 생겼을 뿐 곧 회복됐고, 6주 후 진짜 천연두 고름을 주사했을 때도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만들어진 천연두 백신은 큰 효과를 일으켰고, 특히 세계보건기구(WHO)가 1980년 5월 8일 천연두 완전 퇴치를 선언하면서 천연두는 현재 지구에서 사라진 유일한 바이러스성 질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백신의 의미를 모든 예방을 위한 물질 접종에까지 확장시켰는데, 1881년 탄저병 백신과 1885년 광견병 백신도 개발했다. 19세기에는 계속된 연구로 장티푸스, 콜레라, 페스트 백신이 잇따라 선보였으며 1909년에는 현대 백신의 대명사 격인 결핵예방백신(BCG)까지 개발됐다. 이후 세포배양법으로 바이러스의 증식이 가능해지면서 소크 박사가 개발한 소아마비 백신을 비롯해 홍역·간염 등 백신이 개발돼 인류를 수많은 질병으로부터 해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백신이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지석영이다. 서울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소 입구에는 `유두 보급의 선구자이며 의학 교육자, 한글전용을 제창한 사회, 경제, 문화의 각 영역에 걸쳐 선각자'라는 설명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어지는 설명 `우리 가족에게 먼저 실험해 보아야 안심하고 쓸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글귀가 깊은 감동을 준다.

지석영은 서울 낙원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으나 일찍부터 서양의학에 관심을 갖고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했다. 특히 관심을 둔 것은 영국인 제너(Jenner,E.)의 종두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 후 1877년에 일본 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에서 이 병원 원장인 마쓰마에와 군의관인 도즈카로부터 우두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지석영은 종두법을 더 배우기 위해 1880년 6월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가서 두묘(痘苗·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명에게 우두를 놓아 준 것이 우리나라 백신 접종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때 백신의 안전성을 실험하기 위해 충주의 가족의 희생을 각오하고 실험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1885년 지석영은 우리나라 역사상 첫 우두법에 관한 저서인 `우두신설'2권을 집필했다. 이 책에는 제너의 우두법 발견을 비롯해 우두의 실시,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조, 독우의 사양법·채장법이 서술돼 있다. 지석영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종두검진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도록 하는데 기여를 했다. 이로 인해 마마(천연두)로 인해 곰보가 되는 사람은 현저하게 줄었다.

이처럼 지석영의 노력으로 도입된 우두법은 수많은 민중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자주적인 근대 의료의 기틀이 되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엉뚱한 일에 연루되어 비난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1909년 12월 12일 안중근의사가 저격한 민족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문을 낭독하는 오점을 남긴 것이다.

지석영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민중의 질병과 아픔을 해방시킨 공헌과 민족사의 근본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일생일대의 과오를 동시에 짊어진 분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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